공부·축구·기도 밖에 몰랐던 '순둥이'
수도자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어머니 “한번도 불순종한 적 없어”
성직자 “평소 배려심으로 똘똘 뭉쳐”
제자들 “핵심을 짚는 강의로 유명”
‘정중동(靜中動).’ 사람들은 한국무용을 두고 “정중동의 미가 극치를 이루는 춤사위”라고 말한다. 쉬는 듯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춤,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부단히 움직이는 춤이 바로 한국무용이다. 많은 이들이 조규만 주교의 삶과 신앙은 바로 이 한국무용을 닮았다고 말한다. 그 삶은 ‘정(靜)’이고 신앙은 ‘동(動)’이다.
▨ “네 가겠습니다.”(초등학교 5년 때 신학교에 가라는 권고에 대한 대답)
조규만 주교는 1955년 6월8일, 부산 동래구 칠산동 251에서 조시환(아우구스티노.79)씨와 지복련(글라라.75)씨 사이 5남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 직장을 따라 태어나자마자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로 이주한 조 주교는 어릴 때부터 늘 기도에 열심인 차분한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워낙 과묵하고 순한 탓에 별명도 ‘순둥이’였다. 조 신부 부모는 공소 일을 도맡아 할 정도로 신앙에 헌신적이었다. 어린 조 주교는 어머니와 함께 전례를 준비하고, 공소 신자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5리 10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심부름 다녔다. 조 주교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한 수도자는 “지금 주교님 모습이나, 과거 어린시절 모습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사제직 씨앗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뿌려진다. 당시 동두천본당 주임이었던 고 백일성(도미니코) 신부가 어린 조 주교에게 묻는다. “신부가 되지 않겠느냐.” 당시 신자들은 사제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조 주교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예”라고 대답했다. 조 주교는 최근 인터뷰에서 “그때 ‘예’라고 대답한 것이 하느님의 섭리였음은 한참이나 지난 후에 깨달았다”고 말했다.
어느덧 중학교 진학을 앞두게 된 조 주교. 신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은 그에게 당시 동두천본당 고 이창숙 신부로부터 긴급히 연락이 온다. “왜 소신학교 입학원서를 내지 않았느냐.” 어머니는 다시 한번 어린 조 주교에게 물었다. “너 신학교 가겠느냐.” 조 주교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예 가겠습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서울로 달려가 소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2006년. 어머니 품안의 자식이 어느덧 교회를 이끄는 목자가 됐다. 그 어머니가 말한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말에 한 번도 불평하거나 불순종한 적이 없었던 아들입니다. 이제 주교님이 되셨으니 세상 것을 버리고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착하고 순수하게 하느님 뜻을 따르며 살기를 바랍니다.”
●어머님, 남은 마음과 마음 모두어 드리오니 받으시옵소서(신학교 2학년 때 쓴 시 ‘고통의 어머니’ 중)
조 주교는 소신학교 시절 처음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최근 고백했다.
배가 심하게 아파, 낫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거짓말 처럼 통증이 사라졌다는 것. 하지만 조 주교는 지금은 아무리 힘들어도 기적이나 징표를 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느님께 기적을 구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한 일본 평신도 신학자의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홍인식 신부(가톨릭청년성서모임 지도), 김윤태 신부(서울 구의동본당 주임) 등이 동기. 이들을 비롯한 많은 동기생 및 선후배들은 조 주교를 ‘공부’와 ‘축구’ ‘기도’ 3색으로 기억한다. 조 주교는 책상과 운동장, 성당 어느 곳에서나 열심이었다고 한다. 과묵한 성격답게 공부는 무섭게 했다. 반면에 비오는 날에 운동장에 나가 축구할 정도로 운동에도 열심이었다. 신심 생활은 어땠을까. 신학교 2학년 때 쓴 시 ‘고통의 어머니’를 보면 그 내면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듯 싶다.
“아픔을 다하지 못한 까닭입니까? 루르드에 파티마에 또 이 자리에 오심은 근심을 다하지 못한 까닭입니까?(중략) 어머님 뵙기에 안광은 어둡고 어머님 위로키에 언어는 웅엉거리는 잡음일뿐...” 조 주교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고통을 먼저 봤다. 조 주교가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에 일찍부터 동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 주교의 성품은 의정부 신곡2동본당 최종환 베드로 신부가 주교 임명 직후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평소에 타인들을 위한 배려심으로 똘똘 뭉쳐진 주교님의 성품이, 오늘 주님께서 더 큰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불러주신 듯 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이고 복음선포의 핵심 주제였던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도 여전히 핵심사명이며 첫 번째 과제입니다.(2005년 가톨릭신문 주관 제9회 양한모 기념 가톨릭학술상 수상 후 인사말)
1982년 사제품을 받은 조 주교는 2년이 채 안되는 연희동본당 보좌신부 시절을 제외하곤 대부분 학자의 길을 걸었다. 1986년과 1990년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에서 각각 교의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1991년부터 지금까지 가톨릭대학에서 강의를 해왔다.
조 주교 강의는 편안하면서도 핵심을 짚는 강의로 유명하다. 교리신학원 및 신학교 제자들은 조 주교의 강의를 두고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고 실날을 뽑아 내듯이 들려주시는 강의“라고 말하고 있다.
조 주교는 학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마치 운동장에서 발로 뛰듯 주교회의 신앙교리 위원회 총무,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신학위원,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신학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분주하게 보냈다. 2004년 3월부터 최근까지는 주교회의 사무처장 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직을 역임, 교회 창구 역할을 해 왔다.
주교회의의 각종 위원회와 사무총장직을 통해 조 주교의 진가는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주교회의 활동을 통해 조 주교를 알게 된 많은 이들은 공통적으로 “순수한 인품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배려심, 그리고 행정력까지 고루 갖추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조 주교는 ‘하느님 나라’와 ‘성모님’을 안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저서와 역서, 논문들이 대부분 하느님 나라와 성모님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 ‘성모님’으로 안내하는 문지기, 조규만 주교가 함께하는 한국교회와 서울대교구는 ‘이미’ 행복해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평신도와 사제들이 옆에서 함께 채워가야 할 몫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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