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부르심과 응답
지난주에 복사단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아이들과 스키를 배우러 나섰습니다. 모두들 난생 처음 타보는 스키라서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낯설었습니다. 스키를 처음 타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스키학교에서 아이들과 같이 기본 동작을 배우고 나서 눈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아무리 배운대로 중심을 잡으려고 해도 미끄러지는 스키위에서 중심을 잡는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넘어지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겨우 내려와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아이들은 벌써 스키 선수나 된 것처럼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신나게 눈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스키를 배우면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배우는 속도가 많이 차이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배운 대로 즉시 그것이 몸에 익숙해졌지만 어른들은 한참동안 고생을 하고서야 겨우 흉내를 내는 정도였습니다. 스키를 타면 몸에 부착된 스키 때문에 모든 행동이 부자유스러워지고 방향 전환을 할 때에도 평소와는 반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과 몸이 따로 놀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은 몸에 밴 습관이나 타성이 어른들 보다 적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고 빨리 몸에 익숙해지는 것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네 사람의 어부 이야기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질을 해서 먹고사는 어부들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은 낯설고 어려운 요청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쉽지 않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는 불확실하고 두려운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즉시성’과 ‘순수함’의 열매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즉시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영적 통찰력이라고 부르는 이 깨달음의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지하는 영혼의 능력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을 말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즉시’ 회개의 삶을 시작했듯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그 부르심을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에 즉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냉담자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많은 이들이 ‘먹고 살기가 바빠서요’라는 대답을 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뒷전에 미루어 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에서 얻는 은총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의 삶에 바쁜 것입니다. 바쁜 삶의 여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시간이 없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점점 사는 일에 여유도 잃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먹고 살만해지면 시간을 낼 수 있는 여가생활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삶 일수록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힘과 여유를 은총으로 얻게 되면 사는 일에 활기를 주고 생명을 준다는 것을 모르는 탓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여유 만만해 질 때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부르심은 우리의 삶이 스스로 풍요로워져서 하느님도 은총도 필요 없게 될 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 응답 또한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부르심과 그 응답의 즉시성과 완전성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삶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이 삶을 통해 이루어져야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완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랑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요구되는 사랑의 요청에 즉시, 기쁘게 응답함으로써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간다. 다 지나가고 오직 하느님만 남는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여라”는 데레사 성녀의 말씀처럼 그 어떤 것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머뭇거리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눈 쌓인 산길을 두려움 없이 질주하던 어린이들의 모습 속에서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생기 있는 삶을 본받고 싶습니다. 지금 나의 삶 속에서 나를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망설이고 주저하는 마음 없이 곧바로 기쁘게 주님의 길을 따라 나설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신앙을 청합니다.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http://www.yongmeori.com)henky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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