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이해하려면
십자가의 죽음까지 항구히 따라야
말씀 나눔 기회 만들기
한 주간 동안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통독했다면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꼭 나눔의 시간을 갖기를 권한다. 본당의 반모임이나 가까운 친지들의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말씀을 나눌 수 있다면 혼자 배우고 느낀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방법은 소공동체 복음나누기 칠 단계나 렉시오 디비나 방식을 따라가도 좋겠고, 모임의 성격에 따라서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명화 감상을 곁들이는 좀더 창의적인 방법을 계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의 약점 중의 하나가 신앙 모임에서조차도 하느님 이야기는 뒷전으로 하고 일상적인 대화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삶과 신앙을 통합하고 또 모임의 깊이를 더해 가려면 신앙 나눔을 일상화하고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방식으로 바꾸어갈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는 신앙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필자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도 주일 저녁이면 한 주간의 생활을 말씀에 비추어 영찰(映察, reflection)하는 나눔 기도의 시간을 갖는데, 식탁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이 시간은 각자가 가꾸어가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 관계를 깊이 나누고 이해하는 데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시간이 된다.
모름지기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의 구심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장 큰 이웃 사랑은 각자가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봉쇄수녀원 원장 수녀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회원간의 친교와 이해를 높이기 위해 좋다는 심리학 강의나 프로그램들을 많이 해 보았지만, 렉시오 디비나 기도 방법을 실습하고 난 후만큼 깊은 대화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사실 수녀원이라고 해서 천사들이 모인 것도 아닌데, 평생 함께 살아가면서 인간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 왜 없겠는가? 그건 부모와 자녀,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적인 기대로 혼자 섭섭해 하고 끊임없는 걱정거리로 마음이 산란해지기보다는 우리의 허물과 약점들, 인간적인 한계 상황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시작
서두가 길어졌는데, 각자가 그린 마르코 복음서 전체의 그림을 펼쳐 보이기로 하자. 아마도 우선 마르코 복음서의 범위가 세례자 요한의 활약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수난의 길과 십자가 죽음에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아직 예수님의 유년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또 부활에 대한 기록(16, 9~20)도 후대에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인 배경이 눈에 띄는데,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이 대립적 위치에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여정에 따라 복음서의 구성을 전개한다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1, 1~13),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하시고(1, 14~9, 50),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셔서(10장),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신다(11, 1~16, 8). 부활 후 천사가 예수님의 일행이 갈릴래아에서 다시 합쳐질 것이라고 예고한다(16, 7). 갈릴래아는 여러 민족들, 이방인들의 땅이다.
마르코는 ‘그리고’, ‘그리고 즉시(곧)’, ‘그러고 나서’라는 접속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말은 때와 장소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내가 하고자 하는 중요한 말은 다음에 있다는 듯이 서두르는 인상을 준다.
이 복음서의 최고 정점인 예수님의 수난사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 1~13장이 수난사를 향한 관문이라고 한다면, 14장에서 16장 8절까지는 수난사 자체이고, 나머지 16장 9~18절은 후대의 보충문으로 부활 이후의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 1)이라는 단정적인 서두가 말해주듯, 마르코 복음서의 주된 관심사는 “하느님 아들로서의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은 복음서의 끝부분에 가서야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밝혀진다.
이방인인 로마의 백인대장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 39)라고 고백하는 장면이야말로 마르코 복음서의 최고 정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까지 항구하게 따라가야만 한다는 말이다. 자, 그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의 은혜를 청하면서, 다음 한 주간은 마르 1, 1~13의 여정을 떠나기로 하겠다.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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