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에게 지기 싫어 야구부 따라 들어
싸움대장
내겐 형이 한 명 있었다. 이름은 선형주.
다섯살 위였다. 형은 무엇이든 나보다 잘했다. 공부는 말할 것도 없고 제기차기나 딱지치기, 구슬치기 등 뭐든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리고 착실했다.
그런 형도 가끔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들어왔다. 순진한데다 주먹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형이 맞고 들어오면 동생인 내가 씩씩거리며 뛰쳐나가 반드시 복수를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싸움엔 자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싸움에 진 기억은 없는 것 같다. 나는 상대방의 코피를 터뜨리는데 명수였다. 어린 마음에도 기선을 제압하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애들 싸움에서는 코피를 내면 KO승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선판규)는 여관을 운영하셨다.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골에선 괜찮게 사는 편이었다. 당시엔 배를 곯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집안 형편이 좋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많이 찾아왔다. 부모님은 그 친구들을 모두 친자식처럼 대해주셨다.
야구에 입문
형은 송정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갔다. 포수였다. 그다지 야구를 잘한 편은 아니었다. 내가 야구에 맛을 들인 것은 순전히 형 덕분이었다. 야구가 무척 재미있어 보였다. 유니폼을 입고 치고 달리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형에게 지기 싫었던 나는 4학년이 되자 야구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셨다. 아들 둘이 공부는 제쳐두고 야구에 매달리는게 싫으셨던 것이다. 결국 형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야구를 그만두었다. 아버지께서 야구에 별로 소질이 없었던 형에게 “공부나 하라”며 막으셨기 때문이다. 형의 소질없음이 내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누나들도 형보다는 내가 더 야구에 소질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논다는 사실이 더 즐거워 운동을 했었던 것 같다.
형의 죽음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푹푹찌는 한 여름이었다.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부르셨다. 어서 집으로 가보라고 했다. 형이 죽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만 알았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졌다. 글러브를 팽개치고 뛰어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발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형은 잠자듯 조용히 누워있었다. 형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형, 왜 잠만 자는 거야. 어서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하며 펑펑 울었다. 형의 옆을 지키고 있던 가족들도 함께 울었다.
형의 병명은 백혈병이었다. 형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왠지 비실비실거렸다. 평소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것이 웬지 모르게 얄밉기까지 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형만 보살피는데 샘이 났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중병인지 몰랐다. 형은 중3이 되면서 앓아 누웠다. 학교에도 다니지 못했다. 스튜어디스로 외국을 드나들던 누나가 약을 구해와 1년쯤 더 연명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당시 형의 나이는 17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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