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이루는 사랑
봄기운 피어나듯
며칠 전에 가까운 산에 산행을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작은 찻집에 내걸린 입춘첩 글귀가 벌써 봄이 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선을 쌓은 집 앞에 즐거움이 끝없고, 봄 꽃 아래엔 향기가 넉넉하네’(積善堂前無限樂長 春花下有餘香). 정초에 오는 첫 절기인 입춘이 지났고, 오늘이 정월 대보름날이니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삶 속에도 봄기운처럼 따뜻한 사랑의 기운이 보름달처럼 차오르기를 빌어봅니다.
복음은 얼어붙은 세상에 따뜻한 봄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고 마른 가지에 새 생명을 틔우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은 성한사람 보다도 병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그분께 다가갔고 그 결과 온전하게 치유되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시비를 걸고 그분의 행적에 의심을 품었지만 죄인들은 그분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나병환자와의 만남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치유의 과정을 묵상하게 해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병중에서도 나병은 인간이 겪는 가장 고통스런 병입니다. 문둥병이라고 불리던 이 병에 걸리면 병고를 겪고 있는 이나 함께 사는 사람이나 인생의 겨울처럼 혹독한 고통과 쓰라린 시련의 시간들을 견디어 내야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일생동안 자신의 몸이 썩어 들어가며 서서히 죽어 가는 소름끼치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옛날뿐 아니라 최근 까지도 나병이 걸리면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병이 가져오는 무서운 증상과 흉측한 결과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병으로부터 오는 육체적인 병고보다도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하는 소외감과 관계의 단절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해주는 아름다운 기적은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도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갔던 나병환자의 치유이야기를 통해 당신께 다가온 사람을 온전히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영적치유의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이의 태도와 예수님의 반응은 온전한 치유의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묵상하게 합니다.
치유의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치유를 청하고자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의 용기와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된 나병환자가 예수님과 그 일행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길에서 지나치는 사람을 만나면 종을 딸랑 거리며 “나는 부정합니다!”라고 외쳐야 했으며 건강한 사람들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피했고 나병환자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는 돌로 쳐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 나병환자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내려오는 그곳에 감히 달려와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님께 나아가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무릎을 꿇음은 겸손한 자로서 하느님께 대한 경배를 표할 뿐 아니라 삶에 대한 경의, 이웃에 대한 존중, 자기 자신에 대한 겸허의 자세입니다. 나병환자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은 단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무릎 꿇는 행위 안에서 자신 안에 얼룩진 마음과 영혼의 상처를 바라 볼 수 있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부정과 자기소외의 어둠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 청하는 나병환자의 모습은 예수님의 마음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불러일으켰고 예수님은 주검과도 같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결정하고 주님께서 따라와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 질것을 믿는 간절한 신앙으로 주님께 의탁하는 일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나병환자의 이 믿음이 결국 버림받은 인생을 살리는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춥고도 긴 겨울에도 세상은 봄을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힘겹고 혹독한 시련의 겨울일 지라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손길을 청하면 우리의 삶 속에도 선한 사랑의 기운이 가득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 마을 복숭아꽃 가지마다 맺히는 봄’(玉洞桃花萬樹春)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henkys@hanmail.net. http://www.yongme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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