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집
영국의 어느 주교좌성당 옆에는 ‘자비의 집’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마련된 이 집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성당을 짓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한 여인이 주교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께 “하느님께서 이 성당 옆에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집을 하나 꼭 지으라는 말씀을 주교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주교님은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나서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알았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며칠 후, 그 여인은 또 다시 주교님을 찾아와 똑같은 말을 전했습니다. 주교님은 그 여인에게 “그러면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내 죄가 하나 있는데 그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 달라고 하시오. 그 죄를 알아오면 부인의 말을 믿겠소”라고 하시고는 그 여인을 돌려보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이른 아침, 주교관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그 여인이 급하게 주교님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주교님께서 부인에게 “그래, 하느님께서 내 죄를 알려 주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부인은 주교님께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벌써 그 죄를 용서하시고 잊으셨답니다.” 그리하여 그 주교좌성당에는 ‘자비의 집’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이 함께 지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다가와 치유를 받은 나병환자 못지않게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조차도 없는 상태에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지붕을 뜯어내고서 있는 힘을 다해 당신 앞에 나온 중풍병자를 향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온 사람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선문답(禪門答)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끈을 잡아 보려는 병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신 치유의 기적들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예수님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동기로든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시고자 하신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믿음을 가지고 당신께 다가온 중풍병자를 향해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것은 사랑은 용서를 낳고 용서는 진정한 치유를 낳으며 진정한 치유는 온전한 회복을 이루는 것임을 드러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40일 피정을 하면서 체험한 일이 생각납니다. 피정을 시작하면서 동반자 수녀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묵상하도록 길잡이를 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흐트러진 신앙생활도 추스르고, 그동안 범한 모든 죄를 용서받고 다시 깨끗한 삶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대로 시작한 피정이어서 잔뜩 긴장해 있는 나에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묵상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내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탓에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일은 무언가 순서가 뒤바뀐 듯하고, 하느님 앞에 염치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동반자 수녀님은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용서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랍니다”고 하시며 나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40일 피정의 첫 주간을 하느님 사랑에 대한 묵상과 기도 안에 머무르면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내 마음 안에 차오르는 평화와 위안을 느끼게 되었고 내 자신을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안에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자라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피정기간동안 나는 덕지덕지 때가 낀 영혼을 하느님께 내 맡길 수 있었고 나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속에서 내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을 결심하고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이 놀라운 체험이 나를 이끌고 있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 보다 훨씬 크다’는 영적 진실을 믿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깨끗해져서 하느님 앞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 속에 머무르게 되면 자기 파괴적인 죄책감이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삶을 중풍병자와 같이 뒤틀리게 만듭니다.
온몸이 마비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지붕을 뜯어내고서라도 예수님께 다가갔던 중풍병자의 간절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시며 그를 치유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보다 죄에 대한 집착으로 옴싹 달싹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라.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나아가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 안에 새 일을 시작하시리라.”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http://www.yongmeori.com)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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