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행위
하느님 나라 위대함 드러내는 표징
3.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1, 21~34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
예수님께서는 네 제자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포구,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시는데, 예수님의 하루 일정이 소개된다. 예수님의 활동상 전체를 한 눈에 보여주는 본보기인 셈이다.
안식일 낮에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병자를 고쳐주시고(21~28절),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29~31절), 저녁때가 되어 해가 진 후에는 온 고을에서 모여든 갖가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신다(32~34절).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곧 가르침과 치유 행위는 ‘하느님 나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공통의 표징인 셈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놀라운 분’(22.27절)으로 이해하는데, 가르치시는 내용이나 방식이 율법 학자들과는 아주 달리 권위가 있었고(22절),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기 때문이다(27절).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미친 사람을 고치심(1, 21~28)
율법 학자들이 언제나 구약성서와 조상들의 전통을 근거로 내세워 율법을 가르친 것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을 선포하셨기에 가르침의 내용이 힘차고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참된 권위는 사람을 억압하고 복종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힘을 실어주는 데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력을 되찾아주시는 데 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힘이 그분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오늘날 리더십에서 예수님을 최고의 리더로 보는 것은 그분의 권위가 흔들림 없는 원천에서 비롯하고 또 사람들을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는 데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27절)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는 권능이 있는 것과도 연결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병자를 치유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옛 사람들은 정신병이 더러운 영, 악령에게서 왔다고 생각했다. 일원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히브리인들에게 악령은 하느님과 맞서는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을 방해하는, 그 힘이 만만치 않은 악의 실체였다. 그런데 그런 악령을 단순한 명령으로 물리치시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서로 묻는다. 이 물음은 마르코 복음 안에 계속하여 나오는 “이 분이 누구신가?”라는 질문과 맞닿는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 역시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지금 나에게 예수 이 분은 과연 누구이신가?”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심(1, 29~31)
마르코 복음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이 치유 기적은 전형적인 치유 이적사화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보통 치유사화는 ① 상황 묘사 ② 기적적인 치유 ③ 치유의 실증 ④ 목격자들의 반응 순으로 진행되며 이야기에 따라 약간의 변형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손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고 하여 즉각적이고 완전한 치유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치유를 받은 시몬의 장모가 시중을 들었다고 하는데, 제자로서의 사명을 나타태는 것 같다. 왜냐하면 ‘시중들다’(디아코네인)라는 동사가 ‘따르다’(아콜루테인)라는 동사와 함께 제자직분을 가리키는 데 고유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많은 병자를 고치심(1, 32~34)
이 대목은 예수님의 활약상을 요약해 주는 집약문으로, 안식일이 지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방에서 몰려드는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고 전한다. 그러면서도 마귀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이것은 메시아 비밀과 연결된 함구령이다. 예수님의 진면모가 마귀들에 의해 드러날 수는 없다. 또한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 주는 하나의 표징일 뿐 예수님의 전 인격을 드러내 주지는 못한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나의 온 존재를 걸고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또 그분처럼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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