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물과 더불어 살아갈 존재
동아시아의 사대부와 민중은 가톨릭 신앙이 전해진 이래 새로운 충격을 체험한다. 일례로 영성체 의식과 여기에 담긴 그리스도교 신학은 충격 가운데서도 충격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작은 밀떡으로 변할 수 있느냐, 어떻게 식인(食人)을 할 수 있느냐 하면서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천주교 반대자들이 천주교를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몰아가는 증거로 영성체 의식을 이용하기도 했다.(이기경의 상소 참조)
요한복음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예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논쟁을 벌였다.(요한 6, 51∼52)
제자 중에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하며 회의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했다.(66절)
하지만 유다 외 다른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그분의 사명(missio)을 세상에 전했다. 유럽, 인도와 일본에 이어서 중국에 도달한 신앙이 이벽과 이승훈 등에 의하여 맞아들여졌다. 이들은 성체를 모시는 일을 감격이요 영광으로 알았다.
박해시대에도 신앙인들은 미사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미사는 자기를 비우고 우리 가운데 살러 오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당신의 몸을 내어주어 우리의 축복과 구원을 완성에 이르게 하셨음을 증거하는 성사이다.
이들은 밀떡을 받아 모시며, 바닥을 찾아오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완결지은 당신의 비허(卑虛, kenosis)를 기억하며 감격과 감사를 체험했다.
이 전통 위에서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돌아보라. 이는 천주를 모신 존재로서 천주를 모시듯이 사람들을 섬길 것을 설득하는 영성의 언어로 작용한다. 인간이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나 하느님을 그리며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모습을 온전히 닮기까지 온 창조물과 더불어 살아갈 존재다. 시천주는 이런 존재들에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섬김과 사랑의 실천 사명을 표현하고 있다.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시천주 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인내천 사상은 단순히 인간을 신격화하려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 근본 관심은 인간 존중의 기원을 하느님께 이어 놓으려는 데 있다. 마태오 복음 25장에서처럼, 가난한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당신께 베푼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밝혀 주는 아름다운 전거가 된다.
이 사상은 사회적으로나 국제 관계 속에서 변두리로 내몰린 채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처지를 극복하는 데 근원적으로 요청되는 ‘자기 존중’을 발생시키기도 하였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존재라는 교리가 세계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면 조선 민중에게서 이처럼 시천주나 인내천 사상이 언어화되고 이것이 민중 사이에서 이들을 살리는 영성의 에너지로 작용한 것은 언제부터였는가?
서학과 동학 근본은 ‘인간존중’
우리가 알듯이, 동학이란 서학에 대비된 개념이다. 동학교도들이 말하는 서학이란 천주교를 가리킨다. 이것은 서학의 전통에 닿아 동학관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조선 말기 민중이 천주 신앙이라는 새로운 신앙 전통을 만나서 창조자 하느님을 ‘한울’로 표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위에서와 같은 개념을 통하여 온 생명의 창조-주재자에 대한 관계를 쇄신하는 새로운 영성 기풍을 창출해 갔던 것이다.
이것이 다름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영혼들이 누리는 창조적 축복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천주 신앙이 불러일으킬 영성 쇄신의 전망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도 신앙의 보화를 가톨릭적 정체성에 충실하게 그리고 자기 시대의 정신에 부합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민중을 생기나게 할 원천으로 매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본질적 사명이라 할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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