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체험하면 새로 태어나는 구원의 기쁨 깨달을 수 있어
5.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마르 2, 1~3, 6 카파르나움에서 벌어진 논쟁사화 5편)
예수님께서 유다 지도자들과 논쟁하는 장면을 보면, 우리가 앞서 살펴본 예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님께서 언제 연민의 마음으로 애간장을 끓이시고 부드러운 손으로 병자에게 손을 얹어 치유의 은혜를 베푸셨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마음이 완고해져서 도무지 자신의 위신과 체면, 명예와 영광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길은 혹독한 비판과 단호한 질책뿐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지도자들의 뻣뻣한 목덜미와 위선적인 태도를 못 참으시고 당신 말씀의 권위로써 적수들을 논박하신다.
마르코 복음 2장 1절에서 3장 6절에는 논쟁사화 5편이 실려 있는데(① 2, 1~12, ② 2, 13~17, ③ 2, 18~22, ④ 2, 23~28, ⑤3, 1~6), 예수님께서 병고와 죄, 사회적인 고립과 소외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고, 단식과 안식일 같은 형식적인 규칙을 넘어서 자유를 가져다주신다. 이로써 군중들과 제자들에게는 상당한 지지를 받게 되지만, 유다 지도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반대를 받게 되며, 결국 이야기 끝에 이르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게 된다(3, 6). 적대자들과의 논쟁은 앞으로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7, 1~23), 수난사로 이어질 예루살렘에서의 논쟁 이야기(11, 27~12, 37)와 연결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위 안에서 권위와 힘을 지니신 분이시다. 이제 논쟁사화 안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간접적인 그리스도론’이 전개될 터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면, 자기정체성과 관련된 발언이 눈에 띈다.
사람의 아들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분”(2, 10),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2, 17), “혼인 잔치의 신랑이신 분”(2, 19), “안식일의 주인”(2, 28)이시다. 그러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 22c) 예수님께서 세상에 가져오시는 질서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이다.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새로운 창조이다. 옛 질서에 묶여 있는 한, 새로운 탄생은 없다. 날개를 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비상을 꿈꾼다면, 새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과 만남을 체험한 사람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구원은 새로운 탄생이다.
중풍 병자를 고치심 (2, 1~12)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치유이적사화에 사죄권 논쟁(2, 6~10)이 삽입되어, 예수님께서 인간의 병도 고쳐주시고 죄도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임을 드러낸다.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의 권능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12c절)고 감탄하지만, 적대적인 율법학자로서는 하느님을 모독한다(7절)고 생각할 뿐이다.
중풍 병자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가 없는 사람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가 중풍 병자가 아닐 수 없다. 중풍 병자의 네 친구는 병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헤아려, 그를 침대에 눕힌 채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려 보낸다. 이스라엘 가옥 구조로 볼 때 쉽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적극적인 그들의 행동은 친구에 대한 강한 애정과,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풍 병자인 우리로서는 내 몸을 낮춰 누군가에게 의탁할 수 있는 겸손함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당사자의 믿음은 그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으로 치유해 주신다. 중풍 병자의 죄의 짐은 어쩌면 무거운 몸보다 훨씬 큰 짐으로 억누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죄의 감옥에서 풀려나 가벼운 몸으로 자유를 향해 날개짓을 하자면 용서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누군가 나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의 용서가 없이 죄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 통회한다”는 고백은 나의 죄와 이웃의 죄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연대성을 나타낸다.
내가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서 누군가의 용서가 필요하듯이, 우리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들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작은 용서가 누군가의 영혼을 구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굳이 마음을 닫아걸고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버틸 모진 사람이 있을까?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