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인 창조에 협력해야
하느님의 창조는 과거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존재하시는 모든 곳, 모든 때에 그분의 창조는 계속된다. 이런 의미에서 ‘지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를 말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하느님은 끊임없이 온 생명계의 생명의 원천으로 당신을 내어주신다.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의 한 생태.생명 운동 계열에서 예찬해 온 동학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을 주목할 수 있다.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고 풀이되는 이 사상은 최시형이 주창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한울이 깃든 낟알-밥을 먹음으로써 한울을 먹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밥 한 톨 물 한 모금도 한울 모시듯 정성으로 먹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자각을 갖춘 자는 한울에게서 온 인간으로서, 하늘이 깃든 알곡[天-穀]을 영하여, 하늘을 모신 인간[天-人]으로 살아가면서, 동료 ‘천-인’들을 마땅히 한울처럼 모셔야 한다[事人如天]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천식천’ 사상은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우리가 먹고 또 먹게 하는 일을 하느님을 모시며 봉양하는 것으로 실천할 영성 비전을 열어 준다. 그리하여 이것은 천지만물과 인간 세계의 양육을 하느님의 기운 안에서 회통시킬 전망을 구축하고, 나락 한 알, 밥 한 톨에서도 한울의 섭리를 보고 하느님의 손길과 돌보심을 자각하여 존중할 것을 설득한다.
그런데 혹간 이 사상을 한국의 독특한 것으로 내세우면서 동학 이전에는 이런 이해에 도달한 적이 없는 듯이 말하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세계와 인간[天地人] 이해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태어나서(창세기),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성전으로서(바울로),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 뿌리를 둔 미사를 통해서 그분의 몸과 피를 모시는 존재들이다.(공관 복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의 몸과 피를 그분의 영성과 지혜와 함께 나누고 모신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하여 삼위의 하느님께 부여받은 생명으로 이웃에게서 하느님과 주님을 발견하여 그들을 섬기고 그럼으로써 주님에 대한 모심[侍]을 구현해 가는 존재들, 그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마태오 25장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
이를테면 일부 사람들이 동학 이전에는 유래가 없는 독보적 사상인 듯 말하는 ‘이천식천’ 사상의 핵심이 이미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과 전례 안에서 줄기차게 전수되어 왔다.
동학사상, 가톨릭영성으로 순화
먼저 살펴본 ‘시천주’나 ‘인내천’ 사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학의 이런 영성들이 그리스도교의 생명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에 대한 서학의 전통적 이해를 당대의 삶의 체험에 근거해서 창조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하다.
이것은 이 시대 가톨릭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창조적으로 구현해야 할 사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당연히 동학의 저 깊은 사상의 흐름을 간과하거나 외면하는 것으로는 이 시대에 요청되는 영성의 향기를 발생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도리어 그 깊은 차원을 해독하고 체득하면서 이것을 올바르게 그리스도 신학과 영성 전통에 대면시켜서 상호 소통시키고 가톨릭의 영성 언어로 순화할 역량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국과 세계 가톨릭 교회가 다양한 자연영성 운동들을 단순히 대적하는 데 그쳐서는, 만일 이런 운동들이 한계를 갖고 있다면, 그같은 한계들을 바르게 극복하기 어려울 수 있다. 오히려 이같은 자연 영성들이 추구하는 것을 철저하게 그리스도 신앙의 생명 차원과 대면시켜서 주체적으로 포용하는 가운데 해소시킬 것은 해소시켜 가는 성숙한 그리스도 신학과 영성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충실이 다른 목소리의 건강과 불건전을 식별할 안목을 발생시킬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식별을 통해서 비로소 오늘의 영성의 위기를 넘어서서 보다 더 충만하게 하느님의 지속적인 창조에 협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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