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향하여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우면 산에 자주 오릅니다. 산에 오르는 동안 소음 속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을 수 있고 뒤엉킨 생각의 실마리도 조금은 정리되기도 합니다. 복잡한 세상에 얽매여 살다가 어쩌다 한 번쯤 높은 산에 올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 번쯤 내려다본다는 것은 마음에 새로움을 가져다줍니다.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밤낮 자기가 사는 세상만이 전부인 줄 알고 별것도 아닌 세상사에 얽매여 아웅다웅 거리던 내 삶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 속에 있는 모습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비장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당신이 당하실 수난과 죽음이 패배의식이나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속하는 것임을 미리 알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가시게 될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과 함께 준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 뜻밖의 체험을 한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베드로는 변모하신 예수님을 대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하며 엉겹결에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나선 높은 산에서 세상과 전혀 다른 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베드로에게 산 아래에서 겪어야 했던 혼란과 고단한 삶을 깨끗이 잊게 해주는 체험이었고 그래서 ‘그냥 여기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높은 산에서 보면 세상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가끔 산에 오르면 세상의 시름을 다 잊고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도 커집니다.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나 혼자만의 평화를 누리고 싶은 갈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실수는 그것이었습니다.
나 혼자만의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에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 눌러 앉고 싶은 욕망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이루는 데에 온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고 계시지만 베드로는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나 혼자만의 평화와 안락을 위한 일에 머물고 만다면, 그것은 신앙을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만드는 일이며 하느님을 자기만족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교만한 삶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생활할 때 어느 중국인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주인을 따라 문간에 있는 방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불당처럼 꾸며진 그 방에는 수많은 성상들이 가득했습니다. 크고 작은 부처님상들 옆에는 성모상과 예수님 상, 그리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신상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상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사람이라서 나는 그 친구에게 “취미가 다양하네. 이렇게 여러 가지 성상들을 모으는 것도 취미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음. 이중에 아무나 영험한 분이 나에게 복(福)을 주면 되니까…” 나는 그 친구의 영악한 신앙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자기중심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있으며, 참된 변화를 위해서 겪어내야 할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제안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세와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지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세분이 함께 머물 초막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움켜쥐고 자신이 바라는 평안을 누려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겠지요.
자기만족과 안락 속에 주저앉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신 길을 나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에서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위안과 위로는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잘 따라 걷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힘입어 산에서 내려와 그분이 가신 십자가를 향한 길을 함께 걸어갈 때 그분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http://www.yongmeori.com)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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