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나라는 혁신적.위력적 회개 역시 새롭고 힘차야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음식을 드심(마르 2, 13~17)
앞서 나온 예수님의 사죄권(2, 6~10)에 대한 구체적인 실증으로, 세리 레위의 부르심(2, 13~14)과 죄인들과의 식탁 친교(2, 15~17)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자비로운 처사는 하느님 나라의 구원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는 공식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관세를 거둬들이기 위해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을 했고 터무니 없이 높은 세금을 거둬들여 부당하게 치부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던 레위(마태오라고도 불림)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인간적인 자격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더구나 열두 제자 중에는 열혈당원이 두 명이나 있지 않았던가!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에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15절). 식탁에 함께 앉아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매우 친밀한 사이를 나타낸다.
요즘도 근동 지역에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큰 호의를 나타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을 끝까지 내주지 않았던 것은, 중동 사람들의 손님 대접이 얼마나 극진한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 하고나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스캔들이었다.
예수님께는 죄를 사하시는 절대적인 권한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2, 17)
예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다! 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할 수 있다.
금식 논쟁- 새 것과 헌 것(2, 18~22)
금식에 대한 논쟁(2, 18~20)과 두 가지 비유 말씀(2, 21~22)은 다섯 가지 논쟁사화 가운데에 놓여 나머지 이야기들을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앞의 두 논쟁사화는 죄의 용서를 다루고 뒤의 두 이야기는 안식일 규칙을 다루고 있는데, 단식과 안식일 규정은 1세기 유다교 믿음 체계에서 중요한 토대가 된다. 예수님께서 이 두 근본 믿음에 대하여 중심을 잡아주시는 것이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을 할 수 없다.”(20절) 성서에서 혼인잔치는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종말론적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알려준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단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을 경축하는 기쁨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교회 시대에는 단식의 필요가 절실하다(19b~20절).
21절과 22절은 본디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 온 이중단절어로 새것(새 조각, 새 포도주)과 헌 것(헌 옷, 헌 가죽부대)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혁신적이고 위력적이므로 이에 맞갖은 ‘회개’ 역시 새롭고 힘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름(2, 23~28)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예수님과 그 일행이 걸어가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출출했는지 아니면 입이 심심했는지 밀 이삭을 뜯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걸어온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4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통쾌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27b절). 안식일 법을 상대화하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이 아니겠는가? 핵심을 놓치고 작은 일에 목을 매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8절)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권위가 안식일 제도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하신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해방의 기쁨을 체험하게 한 은총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본래의 법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에 매어달릴 때 더 이상의 생명력은 없고 단지 사람을 옭아매는 덫이 되고 만다. 안식일이 참된 기쁨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은 필요 없고 하느님만이 전부이시라는 진리에 마음을 두어야만 한다.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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