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신앙역사에 무지
한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두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민족적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1995년에 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월간 〈사목〉에 12회에 걸쳐서 토착화 신학의 관점에서 소개하였다. 1996년에는 이 연구를 토대로 〈한국토착화신학의 구조〉라는 책을 출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문제를 따로 다루지는 않기로 한다.
또다른 한 흐름은 한국 가톨릭 교회의 역사에 대한 충실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 교회는 1784년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이래 지나온 220여 년의 역사를 얼마나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있을까?
신앙공동체 정체성 약해
우리 교회는 자기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이 생각할지 모른다.
자신의 역사이니까.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우리 교회 공동체는 심각할 정도로 자기의 신앙 역사에 무지한 면이 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그만큼 정체성이 약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자기의 신앙 전통에 무지해서는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는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이나 주체적인 신앙 실천을 건강하게 실현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에서는 앞을 내다보면서 능동적으로 아시아의 복음화를 이루기란 더더욱 힘들 것이다.
일례로 황사영 알렉시오의 백서(帛書) 사건을 보기로 하자. 우리 교회는 현재 윤지충과 주문모 등 하느님의 종 124위를 선정하여 시복 시성 절차를 밟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온생명계의 원-부모에 대한 믿음과 충실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의인들이었다.
윤지충과 정약종, 이순이, 김대건, 최양업 등과 함께 황사영을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투철한 신앙 증거자로 꼽는 데 별로 이의가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하나인 제천 배론에서 황사영은 지금도 수많은 순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곳 배론에는 그가 1801년 봄부터 일곱 달 동안 머물면서 백서를 쓴 토굴이 보존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이 북한에서 제작한 동상이 성지 경당 옆에 세워져 있기도 하다.
황사영이 한국 교회에서 깊은 존중과 사랑을 받는 것은 그의 신앙 실천에 비추어볼 때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첫 심문 때 왜 그릇된 학[邪學]을 하는가 하고 질문받은 적이 있다. 이 심문 현장에서 그는 당당하게 자기가 서양학을 한 것은 사실이나, ‘서양학’은 ‘정도(正道)’-‘바른 도’라고 천명한다. 그리고는 “백번 생각해도 세상을 구할 양약(良藥)이기에 성심을 다하여 서양학을 하였다”고 밝혔다. 이런 신앙관을 끝까지 지킨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 대역부도의 죄로 서울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형을 당하였다. 그의 아내 정난주 마리아를 비롯하여 남은 가족들은 노비가 되어 귀양을 갔다. 뿐만 아니라 숙부 황석필은 물론 그의 집안의 남녀 노비들도 유배형을 살아야 했다.
황사영 시복시성 대상 아니다
그러면 이 신앙의 증거자, 황사영 알렉시오는 한국 천주교회가 정성을 다하여 추진하는 124위 시복시성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먼저 황사영 백서 사건에 관하여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황사영은 이른바 ‘백서’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백서’에서 ‘백(帛)’이란 ‘비단’을 말한다. 그러니까 ‘백서’란 비단에 쓴 편지를 뜻한다. 그는 가로 약 62센티미터, 세로 약 38센티미터 크기에 122행, 1만3384자를 비단 천에 써서, ‘편지 형식을 빈 청원형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편지를 베이징 교회 지도자에게 보내서, 고난당하는 조선 교회의 실상을 알리고 교회 재건에 필요한 도움을 청하며 신앙의 자유를 얻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한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 것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민족의 역사에서 문제가 되어 온 것이 교회 재건을 위하여 제시한 방안이었다. 황사영의 교회 재건 방책들이 반민족적이었다는 것인데, 어떤 내용이었길래 그를 이른바 ‘매국노’로 비판받게 만들었을까?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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