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는 나에게 하느님 같으신 분이셨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신 할아버지께서 마당을 거니시며 헛기침으로 식구들을 깨우시면 식구들은 모두 모여 어김없이 조과(朝課 아침기도)를 바쳤고, 저녁에는 아무리 피곤에 지친 몸이라도 온 식구들이 모여 만과(晩課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나는 식구들이 바치는 조과와 만과를 따라 하며 기도문을 외웠습니다. 신부님이 안 계신 공소였지만 한 번도 주일을 거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나의 신앙생활에 어느 날부터 조금씩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 놀이에 빠져 있다가 공소 예절에 늦기도 했고, 조과와 만과를 바치는 일도 조금씩 꾀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일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 공소 예절을 빼먹고 점심때가 다 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식구들이 둘러앉은 밥상에는 내 숟가락이 없었습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에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첨례를 하지 않았으면 밥먹을 자격도 없다.” 나는 식구들이 모여 앉은 밥상을 뒤로 한 채 눈물을 떨구어야 했습니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는 온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천주님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놈은 세상을 망치고 인생살이도 망친다”고 호통을 치시고는 회초리를 들어 내 종아리를 치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무섭게 진노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인자하신 할아버지께서 내치시는 회초리의 아픔은 하느님을 속이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가슴 속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진노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딴생각으로 물들어가는 나를 돌이켜 세우는 거룩한 진노였습니다. 지금도 하느님 앞에서 딴전을 피울 생각이 들면 할아버지의 진노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을 지켜주고 하느님 앞에 참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셨던 할아버지의 거룩한 진노를 생각하면 그 크신 사랑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나도 살아가면서 분노를 합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내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고 화를 냅니다. 어떤 때는 말도 못하는 가엾은 것들에게 분풀이를 하기도 합니다. 삶 속에서 내가 분노하는 이유들은 대부분 나 자신만을 위한 분노입니다. 할아버지의 거룩한 진노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헛된 삶으로부터 나를 구하였지만, 나 자신만을 위한 분노는 사람들을 기죽게 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야성의 사나이 같은 모습으로 성전을 차지하고 있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에게 분노를 터뜨리십니다. ‘하느님의 집을 아끼시는 열정’에 불타시는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고 하느님과 세상의 이권의 틈바구니에서 교묘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힘이 넘치고 분노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분노는 개인적인 모욕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 분노는 하느님의 모습을 왜곡하는 행위와 종교적 악습, 위선적인 신앙심에 대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진리를 겉으로 드러내기 위한 ‘충격요법’이었고 하느님의 집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분노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분노는 인간이 자제력을 잃고 타인에 대해서 과격하게 감정을 터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과격한 분노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마침내는 살인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분노를 배격하시고 살인행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 22)
거룩한 분노는 사랑으로부터 오는 분노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분명히 분노하신다고 말합니다. 그 분노는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잘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나오는 애증(愛憎 love hate)입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자식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고자하는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며, 불의를 의로움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하느님의 정의(正義)입니다.
우리의 삶이 타성에 젖어들고 우리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주님의 거룩한 진노는 우리를 정화시키십니다. 세속적인 욕심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구차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는 하느님의 거룩한 진노의 표상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스스로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껍데기는 가라’는 시인의 절규가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의 마음속에 울려 퍼집니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내 안의 성전까지 깨끗이 정화해야만 맞이할 수 있는 부활의 기쁨을 향해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분노로 우리의 위선과 타성의 껍데기를 벗기십니다.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http://www.yongmeori.com)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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