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잃어버린 인간의 비극 그려
창녀 곡예사등 소외인물 자주 등장
부유층 부인 통해 부패 표현하기도
20세기 전반기는 일찍이 미술사에서 그 선례를 볼 수 없었을 만큼 대변혁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야수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등 회화의 새로운 물결과 조류들이 휩쓸었던 당시, 거장들 틈에서 초연함을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으로 깊은 종교적 영감을 표현했던 인물이 루오였다.
장르에 상관없이 다양한 작품 속에서 창녀와 광대, 곡예사 등 당대 사회의 소외된 인물들을 통해 그는 신의 죽음이 선포되던 20세기 말, 신을 잃어버린 인간의 비극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야말로 그는 하느님께 받은 은혜인 신앙을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통해 드러낸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화가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 가톨릭 화가인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는 마티스와 피카소 등과 함께 20세기 전반을 대표한다. 판화가이자 도예가이며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이기도 하다.
위대한 종교화가로서 그는 1871년 5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가구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을 드러내 10살 때부터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14세 때부터 공예미술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낮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업자의 견습공으로 일했다.
1890년, 국립미술학교인 에콜드 보자르의 화실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고 엘리 돌로네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구스타프 모로의 문하에서 마티스, 마르케 등과 교분을 가지면서 재능을 키워나갔다.
1893년 스승인 모로의 추천을 통해 최초의 대작인 ‘연자매를 돌리는 삼손’을 발표하고 2년 후에는 ‘죽은 그리스도와 성녀들의 통곡’을 출품했으나 당대의 조류를 초월한 그의 작품들은 모두 낙선했다. 이때부터 그는 성경과 신화 등 종교적 주제들을 바탕으로 하는 독자적인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1898년에 스승 모로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1903년 모로가 국가에 기증한 아틀리에에 만들어진 모로 미술관장에 임명된다. 모로의 영향을 받았던 이전까지의 그의 작풍은 이때부터 변화되기 시작해 격렬하고 동적인 분방한 선과 짙은 청색을 주조로 한 수채화 등을 주로 그리게 됐다.
특히 미술관장으로 임명된 다음해 교분을 맺게 된 가톨릭 소설가 레올 블루아는 이후 그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루오는 창부, 어릿광대, 풍경 등을 자기 작품의 주제에 자주 등장시키게 되는데,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소외된 인물들을 등장시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바라보고 드러내려는 경향이 점점 짙게 나타난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손꼽히는 유명한 석판화 연작 ‘미세레레’(Miserere). 1927년 총 58매의 판화집으로 제작된 이 연작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시편의 구절을 딴 것으로 50세가 넘어서야 시작된 작품이다.
1908년경부터는 재판관이나 재판의 졍경, 그리고 부유층 부인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는 세속의 온갖 부패와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위선과 악덕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그의 작품 속에서 오만한 재판관과 부유한 부인들이라는 상징적 인물들을 통해서 거침없이 드러났다.
반면, 소외되고 잊혀진 변두리 인생, 즉 창녀와 광대, 곡예사들의 모습에서는 이들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동정이 드러나며, 바로 이들 가운데서 나자렛 예수의 참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버려진 사람들의 비참함과 그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신의 침묵이 지닌 의미 같은 것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심오한 종교적 메시지를 지니면서 드러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바로 “그의 예술은 그의 신앙고백”이라고 일컬어진다.
사실 그의 작품들은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주제들을 구체화해 설명하지는 않는다. 교회로부터 직접 의뢰받아 제작한 것은 그가 74세 되던 해 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밑그림을 그린 단 한 건에 지나지 않는다.
대표적인 종교화가
하지만 미술사는 루오를 가리켜 현대의 가장 위대한 종교화가라고 부르며, 20세기 회화사에서 그는 여전히 가장 대표적인 종교화가로 손꼽힌다. 그 이유는 그가 교리나 복음의 내용을 직접적인 주제로 해서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메시지를 그 시대의 살아있는 상징들을 통해서 드러냈기 때문이다.
1951년 교황 비오 12세가 80이 된 그에게 그레고리오 대교황 훈장을 수여한 것은 그의 예술 세계에서 짙게 드러났던 바로 그런 종교적 메시지를 분명하게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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