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중독, 교회가 예방·치유 나서자
복권 제외한 도박 참여인구 2604만명
각종 중독문제 사목영역이란 인식 필요
일상화된 게임장 출입
중소기업에 다니는 박제원(가명, 33)씨는 점심식사 후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박씨가 “잠시 볼일을 보고 오겠다”며 찾는 곳은 바로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생긴 성인오락실.
80평 남짓한 건물 2층 전체를 게임장으로 쓰고 있는 오락실에 들어선 박씨는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신종 릴게임(일명 빠찡꼬)기 앞에 앉는다. 만원짜리 한 장을 게임기 투입구에 집어넣자 화면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대낮인데도 컴컴한 실내에서는 박씨 말고도 어림잡아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게임기를 옮겨 다니고 있었다. 뿌연 담배연기 사이로 가정주부로 보이는 여성들도 게임에 푹 빠져있었다. 게임장에 있던 손님들은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하는지 서로들 아는 눈치였다. 게임이 진행되는 기계들은 수시로 배출구를 통해 5천원짜리 상품권을 몇 장씩 뱉어냈다. 상품권이 쌓이자 오락실 아래층에 있는 ‘상품권’이라고 써 붙인 환전소를 들락거리며 만원짜리로 바꿔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게임에 열중한다.
점심시간을 넘긴 시간까지 화면을 지켜보며 베팅을 한 박씨가 1시간 남짓한 동안 잃은 돈은 8만원. “게임중독이지 도박중독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박씨의 시선은 화면에서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박씨가 도박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지금의 회사로 옮기면서였다. 회사 동료들과 우연히 들렀다 재미삼아 한 일이 이제는 하루도 거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퇴근 후에는 아예 오락실에 살다시피 한다. 초기에는 회사일을 핑계로 늦게 들어가곤 했지만 이제는 그가 도박을 한다는 사실을 처갓집까지 다 알게 됐다. 결혼을 하며 마련한 집도 도박으로 늘어난 빚 때문에 전세로 옮긴 터였기 때문이다. 갓 세살을 넘긴 딸을 둔 아내는 이혼까지 불사하겠다고 했지만 약효는 얼마 안갔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게임기를 떠나지 못하는 박씨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그 기계, 지금까지 43만원이나 밀어 넣었는데 한번도 안 터졌다”고 하자 그제서야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정리한다.
일상으로 침투하는 도박
사행산업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서민들의 삶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돈 많은 기업가나 전문인, 유명 연예인 등 몇몇 부류의 일로만 여겨지던 도박이 가정주부, 교사, 학생 등 계층과 지위, 나이에 관계없이 확산돼 나가고 있다. 심지어 초등학교 앞까지 미니 룰렛게임기가 버젓이 설치돼 어린이들이 길바닥에 앉아 한탕을 기다리며 도박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불법 성인오락실로 인한 폐해는 더욱 클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서울에서 문을 연 성인오락실만 537곳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 평균 67곳, 하루 평균 2.2곳꼴로 생겨나는 셈이다.
지난 성탄절에는 강원랜드 호텔 4층 카페테리아에서 한해 동안에만 모두194번이나 도박장을 드나들며 수억원을 빚진 김모씨(54.경북 영주시)가 투신 자살했다. 강원랜드 개장 이후 일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등 도박으로 자살한 사람은 모두 17명에 달한다.
도박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뿐 아니라 그 피해가 가족 등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도박중독자들의 자활모임인 단도박 모임에서 만나는 이들 대부분이 인간관계 붕괴나 가정파탄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드러내준다. 권병휘(아우구스티노) 사행산업 규제와 개선을 위한 전국 네트워크 대표는 “레저라는 이름으로 도박을 포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가족과 함께 찾을 수 있는 경마장은 제주, 부산, 과천 등 3곳 뿐”이라고 밝혔다.
통계조차 없는 현실
더 큰 문제는 도박중독이 확산일로에 있지만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2005년말 카지노와 경마, 복권 등 소위 도박산업의 총매출은 14조1459억원에 달한다. 복권을 제외한 도박 참여 인구도 2604만명으로 집계됐다. 특히 이런 사행산업이 전체 레저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7.6%(불법 사행산업 매출 제외)로 드러나 레저산업의 왜곡현상도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마사회가 지난 2003년 발표한 용역보고서 ‘도박중독 척도 개발 및 발병률 조사’에 따르면 경마와 경륜, 카지노 고객 가운데 문제성 혹은 병적 도박자의 비율은 각각 34%, 39.5%, 49.1%였다. 이로 인한 생산성 저하와 사회 손실은 10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
도박중독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은 쉽게 사행산업장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마의 경우 과천과 제주의 본장 외에 마사회가 운영하는 장외발매소만 32곳이다. 경륜장 본장은 3군데, 경정장 본장은 1군데지만 장외발매소는 경륜장이 15군데, 경정장이 8군데다. 문제는 여러 지방에서 장외발매소 건립을 추진 중이라는 점이다. 이는 세수 확대를 위한 지방자치단체와 매출의 약 70% 이상을 장외발매소에서 거둬들이고 있는 각 기관, 여기서 각종 기금을 마련하고 있는 정부부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로 인해 ‘도박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음에도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도박중독자들을 위한 치료와 재활프로그램이나 예방사업 등은 턱없이 부족해 대부분 방치돼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지자체들은 한술 더 떠 세수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장외발매소와 불법 성인오락실 난립을 부채질하고 있다.
교회 차원의 의식 전환 요청
교회도 지금까지 도박중독이나 사행산업에 대해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우선 도박 등 각종 중독문제를 중요한 사목 영역으로 고려할 필요성이 있다.
현재 윤리신학에서는 도박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는 실정이다. 갈수록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도박문제와 관련해 도박이 곧 우상 숭배와 몰입으로 표현될 수 있는 반신앙적인 행위임을 알리고 신학, 사회교리, 예비신자 교리 등을 통해 도박 문제에 적극 대처해나가야 한다. 특히 사회의 건강성이 곧 교회로 이어지는 만큼 노동의 가치를 살려낼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일궈내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박이 양산하는 문제점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 구축을 위한 정책 제안을 비롯해 도박 중독자 예방과 치유를 위한 활동 등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인터뷰-권병휘 ‘사행산업 규제와 개선…공동대표’
“중독은 장애와 같아 교회 영적지도 절실”
중독 극복 위해서는자발적 의지가 중요
“하느님께서 줄곧 지켜주고 계셨다는 생각뿐입니다. 저를 변화시켰던 교회의 영성적인 면을 바탕으로 도박중독자들에 다가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행산업 규제와 개선을 위한 전국 네트워크’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도박중독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는 권병휘(아우구스티노.67.서울 사당동본당)씨. 그 자신이 오랫동안 도박중독증에 빠져있다 신앙의 힘으로 어렵게 헤쳐 나왔기 때문일까, 권대표는 교회의 역할을 수없이 강조했다.
권대표가 도박중독의 길로 접어든 것도 대부분의 중독자가 그렇듯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같이 하숙을 하던 동료교사들과 스트레스 해소 겸 재미삼아 한두번 고스톱을 치다 빠져들고 말았던 것. 시간만 나면 도박장을 찾다 결혼 후에도 도박에서 손을 떼지 못한 그는 당시로서는 집 한 채 값인 50만원을 날리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신앙은 오묘한 길을 열어보여 주었다. 1986년 여름 무렵, 주위의 도움으로 단도박모임을 이끌고 있던 신부를 만나기 시작한 것이 그에게는 새로 나는 계기가 됐다.
“도박을 친교나 오락, 여가 선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도박으로 인해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신앙에서 멀어져온 현실을 안타깝게 지켜봐온 그는 도박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지녀줄 것을 호소했다.
“도박중독자를 비롯한 모든 중독자들은 ‘중독장애인’으로 봐야 합니다. 중독은 완치란 있을 수 없고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하는 장애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직과 열린 마음, 자발적 의지가 중독 극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꼽는다. 도박을 끊은 지 20년이 됐지만 늘 굴뚝같이 치미는 도박 욕구를 누르느라 상갓집을 갈 때도 아내를 데리고 갈 정도라는 그는 교회의 영적인 프로그램이 도박중독자들에게 절실하다고 역설한다.
“하느님께서는 늘 함께 하고 계시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중독자들입니다. 중독자들을 영적으로 성장시켜 열린 마음과 의지를 지닐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교회가 모든 중독자들을 장애인으로 감싸 안는 것은 물론 중독자들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관련 연구기관을 만들고 사행산업이 만연한 사회가 올바른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줄 것을 요청한다. 특히 권대표는 중독자들에 대한 예방과 치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들의 재활과 가족 보호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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