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추기경 시대, 한국교회 과제(3)
양극화 등 사회적 문제 산적
이념분쟁 등 갈등 해소위해 정신적 지도자로서 역할을
3. 사회통합의 과제
우리 사회에서 가톨릭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금까지는 상당한 수준으로 긍정적이며, 민주화 시대를 거쳐오며 축적된 최후의 양심의 보루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사심 없이 대사회적 기여를 해온 종교 집단으로서의 호감으로 구축돼 있다.
‘교황’이라는 존재가 전세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미지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고 있듯이 한국 사회 안에서 ‘추기경’이라는 위치, 특히 독재 및 전체주의에 대한 항거와 그를 통한 민주사회의 실현이라는 근현대의 격동 속에서 유일한 고위 성직자,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존재는 한국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감 섞인 이미지의 많은 부분을 대변해왔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의 추기경은 단지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원로이자 최후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이미지 메이킹이 돼왔으며, 정치 사회는 물론 여타의 어떠한 종교 지도자들도 그 영향력이나 권위에 있어서 추기경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실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 이같은 도덕적 권위를 지니고 있던 한국 천주교회의 추기경은 따라서 혼돈과 격변의 시기에 공동선을 향한 사회적 통합의 중추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김추기경은 결정적 판단을 해야 할 때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판단을 제시했고, 교회나 교회 구성원의 존립과 안위에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을 때에도 역시 과감하고 예언자적인 소명을 바탕으로 정의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데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러한 실천적 예언직의 수행은 우리 사회와 국민들이 무엇에 근거해 판단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길을 안내했으며, 파편처럼 서로의 의사와 뜻이 갈라질 때에도 마침내 국가와 사회의 공동선을 위한 사회적 통합의 길을 모색해 찾아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천주교회의 추기경이라는 존재는 우리 사회 안에서 의견 합일을 보고, 난마처럼 얽히고 분열된 사회적 의견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사회적 통합의 중추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복수 추기경 시대를 맞았다는 사실은 공동선을 향한 사회 통합의 새로운 장을 마련해야 할 또 다른 과제를 던져준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행된 후 추기경의 역할과 기대에 변화가 발생해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복수 추기경 시대에 사회 통합의 핵심으로서 추기경에게 기대되는 원로의 리더십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독재와 민주, 억압과 항거 혹은 해방, 획일과 다양성 등 대치 국면을 형성하는 이분법적인 구도가 아니라 매우 다양한 사고와 행동양식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논쟁과 입장은 둘이서 맞서는 국면이 아니라 수많은 입장과 주장들이 늘어서 있다. 이러한 다차원적인 논쟁과 입장 차이는 사회적 통합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를 일게 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회 통합의 중심으로서 가톨릭교회, 특히 추기경의 존재는 더욱 절실해진다. 사회 참여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없다. 오늘날 교회는 과거처럼 민주화 운동이나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날이 서 있는 사회 참여를 요청받지는 않지만 참으로 복음적인 사회 건설,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더욱 광범위한 인권 수호를 위한 또 다른 형태와 수준의 사회 참여를 요구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임 정진석 추기경의 노선과 기대 역할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김추기경이 민주화와 사회정의라는 70~80년대의 정치적 과제와 힘겨운 씨름을 했다고 하면, 정추기경은 정보화, 경제 전쟁, 다원주의, 사회 양극화, 이념 분쟁 등등 더욱 폭넓고 다차원적인 사회적 과제들과 맞닥뜨려 있다.
그런 가운데 정추기경의 가장 뚜렷한 사목적 과제인 가정과 생명 가치의 수호를 위한 노력은 새로운 사회 참여의 핵심을 이룬다. 한편으로, 가정과 생명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 영역은 사목적 돌봄과 사회 참여로 간주될 수 있는 여타의 활동에 있어서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정의 가치를 수호하고 생명 문화를 건설하는 일은 오늘날 가장 긴급하게 실천해야 할 사회 참여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민족화해와 통일, 북한 선교를 위한 사목 프로그램 역시 사회 참여 및 사회적 통합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부분이다. 사실 우리 사회 안에서 북한에 대한 입장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되는 교회의 대북 정책 수행은 참된 민족 화해를 위한 하나의 선례로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추기경은 추기경 임명 이후 처음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이같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즉 사회적 발언이 많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정추기경은 “정치든 경제든 전문가가 많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내가 발언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 물론 하느님의 원칙을 알릴 때에는 불가피하게 발언을 했다”고 설명했다.
복수 추기경 시대, 신임 정추기경에게서 사안마다 표출되는 사회적 발언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의 입장 표명과 사회적 발언이 필요한 부분들, 특히 생명, 가정, 환경 문제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꾸준하게 이어질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강경한 입장 표명도 여전히 이루어질 것은 분명하다.
사진설명
사회적 통합과 갈등 해소를 위한 국가와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추기경의 역할이 막중하다. 사진은 천주교 20여개 단체가 우리 쌀 지키기 ‘식량주권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아래는 사형제도 폐지와 종신형제 도입을 촉구하는 서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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