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기에르주교 발자취를따라서(하)
죽음의 길 ‘서만자~마가자’ 순례
선교사로서 의지 불타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 합니다. 지금이 제 여행 중 가장 험난한 여정입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1836년 10월 6일 브뤼기에르(소바르톨로메오) 주교가 서만자를 출발하기전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 중 일부. 소주교는 아마 자신의 마지막 여정임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편지에서 ‘파리외방전교회가 만주 선교를 담당해야 장차 프랑스 선교사들이 좀 더 쉽게 조선에 잠입할 수 있다며 이 사실을 교황청에 품신하라’고 간청했다.
수많은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한발 한발 조선으로 향하던 브뤼기에르 주교. 소속 수도회인 파리외방전교회조차 ‘조선 입국 의지를 버리라’고 만류하지만 조선 선교사가 되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월 3일. 순례단이 서만자에 도착한 시간은 일몰 직전. 서만자 교구 요량 부교구장 주교를 만났다. 날이 어두워져 장가구라는 조금 더 큰 도시로 돌아와 하룻밤을 묵었다. 서만자를 보고 싶은데, 마가자 가는 길목인 적봉으로 대형버스가 갈 수 없다고 해 북경을 경유해 마가자로 가기 위해 다음날 일찍 장가구를 출발, 북경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속도로 정체로 장가구로 복귀해야만 했다.
복음화율 36%인 서만자
‘인간지사는 새옹지마’. 나쁜 일 후엔 좋은 일. 장가구에 미니 버스가 올 때까지 서만자를 둘러보자는 의견에 따라 다시 서만자로 향했다. 소주교가 살았던 토굴과 가옥, 신학교 터, 성직자 묘원 등을 보며 ‘우리의 아쉬움을 해소해 주는 또 다른 하느님의 섭리’를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5개 현을 포함하고 있는 서만자의 총인구는 11만명. 이 중 사제수 17명, 신자수 4만여명. 복음화율이 36%에 달한다. 앵베르 범 주교도 이곳에 3년여 살다 조선에 입국했다.
3월 5일 새벽 2시경 적봉에 도착.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미사를 봉헌한 후 적봉교구장 주문어 주교와 환담. 염수의 신부(서울 개포동본당 주임)는 이 자리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이번에 발견된 원묘비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원묘비를 원래 자리에 복원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에 주주교는 역사자료의 소중함에 동감을 표시하고 “묘비 관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포장이나 비포장이나 별 차이가 없다. 도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조금은 힘든 코스. 지난해 여름 장마때 도로 유실이 많았고, 겨울이 되니까 얼음까지 얼어있는 상태. 그래도 가야한다. 순례단 중에 “브뤼기에르 주교님 일행처럼 우리도 한번 내려서 걸어보자”란 제안이 나왔지만 “위험하다”는 반론에 “다음 기회”로 미뤘다.
조선 사랑에 눈시울 붉혀
마가자에 도착한 순례단은 마가자 천주당 무수강 주임신부, 이금도 신부와 함께 묘비 기증자인 왕자춘씨 집을 방문한 후 동산천주당 묘원으로 가서 원묘비 축복식을 거행했다. 마가자에서 숨을 거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며…. ‘순직’ ‘무혈순교’. 그 어떤 말이라도 괜찮다. 중국을 눈앞에 두고 숨을 거둔 예수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또 조선 팔도를 숨어 다니며 선교하다 과로로 숨을 거둔 최양업 신부에 비길만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 앞에 순례단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내일을 열게 만드는 것은 오늘의 기쁜 추억들이다. 이번 여정에서의 여러 체험들이 순례단원들의 가정과 직장, 또 교회공동체 삶에 도움이 되길 소망합니다.”
염수의 신부는 순례단원들을 이렇게 격려하며 “우리가 봐서 좋은 길이 아니라, 하느님 봐서 좋은 길로 인도해 주길 기도드리자”고 당부했다.
“밀알 하나로 시작한 일 신앙 돋우는 열매 맺어”
■개포동본당 순교자현양위 송봉자 위원장
“중2때 가톨릭대학교에서 서울대교구 역대 교구장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맨앞에 걸려 있는 사진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문제가 있는 분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 개포동본당 순교자현양위원회 송봉자(아녜스.59) 위원장.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에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 중 한 명.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난 것은 중2때. 하지만 남아 있는 기억은 ‘뭔가 문제가 있는 분’이라는 것 외에는 없다.
“‘밀알 하나 뿌리는 마음으로 시작하자’란 염신부님의 말씀에 감동받아 현양사업에 뛰어 들었죠. 제가 어렸을 적에 뵌 분이 브뤼기에르 주교님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됐습니다. 알고보니 훌륭한 분이셨네요.”
송위원장은 “소주교님이 아마 우리 신부님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 같다”며 “신비스러움을 느낄 때도 많고, 축복받고 있음을 느낄 때도 많다”고 말한다.
1966년에 세례를 받은 송위원장은 어느덧 신앙생활 40년에 접어들었다. 그래도 가끔은 흔들렸는데 브뤼기에르 주교님 현양 사업을 하다보니 이젠 오로지 ‘신앙’이다.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신앙’입니다. 현직 교사시절,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에게 신앙을 가질 것을 권유했습니다.”
‘신앙만이 삶의 열쇠다’. 송위원장의 신앙에 대한 가치관이다. 그래서그런지 본당활동도 많이 했다. 구역장에다 청소년분과장에, 지금은 본당 부회장을 겸하고 있다.
송위원장에 대한 평가는? ‘한번 하면 끝장을 보는 사람’. 그래서 일을 시켜도 절대 후퇴가 없는 사람으로 통하다 보니 많은 일들이 주어진다. 여기에다 나눔도 인색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어떤 수녀님이 '갚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가만히 있으니까, ‘장애인은 너희 흠을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이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너의 슬픔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설명하셨어요.”
송위원장은 그래서 나눈다. 카자흐스탄 돕기 후원회 회장 등 여러 나눔을 실천하는데도 소홀함이 없다.
■서울 개포동본당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사업 연혁
2004년 12월: 2005년 본당 설립 2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현양 결의
2005년 2월: 1차 답사. 소주교 묘소와 차기진 박사 증언 확인
3월: 답사 보고서 발표와 사진전
4월: 묘역 철문 세워짐. 현양사업위한 기도 시작
5월: 묘소비석 건립
6월: '착한목자, 브뤼기에르 주교' 발간, 현양비 세움
7월: 2차 답사. 순례에 앞선 점검
8월: 현양비 좌측에 한글, 중국어, 영어로 된 안내판 세움. 1차 순례.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 묘비와 현양비 축복. 현양미사
10월: 주교 선종 170주기 추모.현양 대미사 봉헌. ‘여행기.서한집’발간. 생애와 성품을 담은 CD와 테이프 출시(구입문의 02-574-4744, 011-213-1032)
2006년 1월: 주교 원묘비 발견
3월: 3차 답사. 서만자~마가자 죽음의 길 답사. 원묘비 축복.
사진설명
▶순례단원들이 서만자 성당 성직자 묘원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살았던 토굴.
▶염수의 신부(왼쪽)가 적봉교구장 주문어 주교(오른쪽)와 환담하고 있다.
▶마가자 성당 신자들이 성당 앞에서 한국 순례단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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