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까지도 용서한 ‘사랑의 기적’
“유씨 두 자녀도 키우고싶어”
법원에 사형철회 탄원 제출
남몰래 영치금 넣어주는 등 그동안 속깊은 사랑 보여줘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 4. 7)
기적!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른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손에 노모와 아내, 4대독자 등 온 가족을 잃고서도 그를 위한 탄원서를 내 세간을 놀라게 했던 고정원(루치아노.64)씨에게서 우리는 조그만 기적을 발견했다.
그런 고씨가 최근 유영철을 양아들로 삼고 싶다는 뜻을 밝혀 다시 한번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영철의 두 자녀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 키우고 싶다는 바람까지 털어놓아 용서의 극치, 사랑의 위대함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고씨의 이같은 결심은 그를 지속적으로 만나며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조성애 수녀(주교회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위원)를 만난 자리에서 속내를 털어놓음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지난 설날을 앞두고도 남몰래 유씨에게 영치금을 넣어주고 “그의 아이들이 떡국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부모를 잘못 만나 평생 멍에를 지고 살지나 않을까 염려된다”는 말로 속 깊은 사랑을 보여주었던 그였다.
이런 용서와 사랑의 모습은 과거에도 없지 않았다. 이른바 ‘여의도 차량질주사건’으로 애지중지하던 손자를 잃고서도 손자를 죽인 살인자를 찾아가 용서했을 뿐 아니라 옥바라지에 구명운동을 하다 나중에 양자로 삼기까지 했던 신자 할머니가 있었다. 그러나 고씨의 경우는 모든 가족을 한꺼번에 처참한 모습으로 떠나보낸 터여서 그의 사랑과 용서는 더 큰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들은 저를 미친 사람 취급할 지도 모릅니다. 원수의 아이까지 키우겠다고 하니…. 그러나 제 가슴 속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을 저도 어찌하지 못하겠습니다.”
고씨의 놀랍기만 한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은 그의 선택을 ‘기적’이라는 말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 3월 24일 서울 방배4동성당에서 열린 생명윤리 특별강연회에서 고씨를 만난 신자들은 끓어오르는 감동을 주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교정사목 후원활동을 하며 재소자들과 만나왔다는 최정순(마리나.54.서울 사당5동본당)씨는 “그분을 통해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며 “그에게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신 분은 하느님이심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결심이 알려진 후에도 담담하게 성당과 집을 오가며 신앙을 키워가고 있는 고씨는 “늦게나마 하느님을 알게 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말로 현재의 심경을 드러내 보였다.
“제 마음 속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오롯이 저를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힘 때문입니다. 제 힘만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아픔을 이렇게 이겨나가게 해주시니까요.”
하루도 빠짐없이 펜을 꾹꾹 눌러가며 성경을 필사하고 있다는 고씨.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볼 때마다 천국에서 손짓하는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는 것일까, 알듯 말듯 한 미소가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의 의미를 오래도록 생각하게 한다.
사진설명
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씨를 양자로 삼고자 뜻을 밝힌 고정원씨가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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