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산다
며칠 전에 길을 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어린 새싹이 힘겹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돌처럼 단단한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생명의 기운이 신비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여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이 굳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 생명들의 모습 속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봄기운에 새싹들이 땅을 뚫고 올라와 생명의 싹을 틔우고 가지마다 움트는 생명을 잉태하고 지탱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씨앗이 썩어야만 가능하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썩는 일이 필요한 것임을 잊고 살아가곤 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겪어야할 진통이 있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는 견디어내야 할 고통과 시련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과 시련의 십자가 앞에서 한 알의 밀알을 생각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죽고 썩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이 싹을 내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진리를 당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내 보이십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심정으로는 죽음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분도 죽음을 앞두고 근심하셨고 ‘아버지’께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깨달았고 당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완성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만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이번 사순절에는 무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겠다는 각오로 신자들과 함께 ‘은총의 사순절 40일 새벽미사’를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사순절 동안 매일 새벽에 미사를 봉헌하며 ‘탈출기’를 묵상하고, 각자 새로운 삶을 위한 지향을 두고 주님께 은총을 청하며 바치는 미사입니다. 미사를 시작하는 날 새벽, 성당좌석의 거의 절반을 채운 신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참석하리라고는 기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사순절을 계기로 새로운 삶을 위한 노력을 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는 모습이 너무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매일 아침 꼭두새벽에 일어나 그날 봉독할 탈출기를 묵상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일어나 미사에 참례하고 서둘러 돌아가 식구들 아침 식사를 준비할 신자들이 대부분인데 엄살을 부릴 수도 없었습니다.
요즘은 부활절이 가까워질수록 은총의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표정에 신비스러운 평화가 머무르는 모습을 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봉헌하며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체험하며 고통스런 일들 속에서도 이 미사를 통해 힘을 얻는다는 신자들의 나눔을 들으며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을 새로운 마음으로 새겨듣게 됩니다.
나는 이 미사를 통해서 큰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묵은 생활을 벗어버리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때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신비로운 변화는 삶의 축복이 됩니다. 아침마다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더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은 주님께서 나에게 이루어 주신 새로운 삶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며 애쓰는 신자들의 모습은 서로에게 영적인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죽어야만 산다’는 진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영적진리이며 우리가 새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풍성한 열매는 한 알의 씨앗이 죽어야만 이루어진 결실이듯이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힘들어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사는 이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희브 5, 8)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http://www.yongmeori.com)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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