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신앙정신으로 수행
황사영 백서 사건의 의미를 충실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황사영의 믿음의 여정을 간략히 돌아보기로 하자. 1775년에 태어난 황사영은 1790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그는 이해에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의 큰딸 명련(난주, 마리아)과 결혼한다. 그리하여 아내와 함께 자연스럽게 서학도 만난다.
결혼 후 ‘알렉시오’로 영세
황사영은 1790년 무렵 이승훈에게 서학 서적들을 빌려 보면서 천주 신앙에 눈뜨기 시작한다. 그는 1795년에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을 택한 것이 그의 신앙 여정과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알렉시오 성인은 4세기에 로마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경건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결혼하던 그날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영화를 뒤로하고 거지 차림으로 집을 빠져나갔다. 그후 17년 동안 타국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수행에 정진한다. 사람들이 그의 성덕을 칭송하기 시작하자 다시 로마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이제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 집에서 17년간 구걸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리하여 가톨릭 역사에서 그는 가난과 극기의 영성을 실천한 성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알렉시오의 이같은 삶의 여정은 황사영이 살아간 여정과 일정하게 상통하는 면이 있다. 황사영 역시 양반집 후예로서 16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였다. 그런 그가 결혼과 함께 천주를 알게 된 이후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고자 천주교에 입문하였고, 엄혹한 박해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심화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서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절친한 인척 약종과 가까운 친척 승훈을 따라 과거를 폐지하고 오로지 사학을 연구하며 밤낮으로 얼굴이 누렇게 뜰 정도로 공부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서학을 천착하였다(〈눌암기략〉 참조).
황사영은 신유 박해가 발생하여 도피할 때도, 자기가 믿는 수준에서이기는 하였으나, 가톨릭의 정도를 따르고 싶어하였다. 일례로 황사영은 김의호에게 도피할 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모습을 감출 수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으면 좋겠다고 답하자, 황사영은 중으로 변장하는 것은 천주교와 맞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그만큼 그는 당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황사영은 모진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는 상황에서조차 자신이 서약한 대로 이틀씩 대재를 지키고자 노력하였다(백서, 120∼122행). 여진천 신부가 주목하듯이, 그는 고신과 극기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비웠던 알렉시오 성인의 영성 모델을 마지막까지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이다.
박해피할때 승복 변장 거부
이 모든 사례들은 황사영의 수행이 얼마나 철저한 것이었는가를 말해 주는 표지들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위에서 본 승복을 거부한 예는 그의 신앙이 그만큼 근본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가 택한 세례명 ‘알렉시오’는 그의 천주 신앙관이 이미 일정하게 탈세속적 성향을 띠고 있음을 시사하지 않는가 싶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탈세속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 형태가 사회 관계 속에서 발생시키는 역동성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황사영이 겪었던 것처럼, 신앙의 자유가 정치 권력에 의하여 억압당하고 신앙살이가 목숨을 건 투신의 성격을 갖는 상황에서 초탈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신앙 형태를 드러낼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주도 종교 세력을 형성한 상황에서 내세 지향적 근본주의 신앙 형태를 주창하며 다른 종교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강요하는 근본주의 신앙 행태를 드러낼 수도 있다.
이 둘은 사회 관계에서 발생시키는 결과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충실로, 후자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같은 사회 정황의 차이를 고려할 때만이 비로소 황사영의 근본주의적 신앙 성격은 물론 일종의 저항 방식이자 더 큰 악의 극복 방안으로 제안된 차악(次惡)으로서 서양 선박 청원이나 조선의 내복과 부마국화 방안을 보다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