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의 두 얼굴
4년 전, 온 나라를 환호와 열기로 들뜨게 했던 월드컵 군중들의 열광은 세계적인 뉴스거리였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월드컵 응원전의 한국인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도처에 모여 응원을 하는 것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과연 군중은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군중의 거대한 힘은 새 역사의 물꼬를 트기도 했지만 반대로 가장 추악한 인간성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 시대에 히틀러의 선동에 따라 독일 군중들이 보여준 무서운 단결과 힘은 군중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성주간 동안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에는 군중들의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첫 번째 군중의 모습은 환호하는 군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에 목말라했고 호기심으로 몰려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몰려다니는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에 흥분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굉장한 이벤트(?)를 벌이시리라 기대하였고 흥분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신 예수님은 당신의 표징에 호기심을 지니고 기웃거리는 군중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흥분한 군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2, 24) 예수님은 다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두 번째 군중의 모습은 배반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바랍빠와 예수님 중 누구를 석방할 것인가에 대한 빌라도의 요구에 바랍빠를 선택했으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씁니다. 이것이 무리들의 두 번째 얼굴입니다. 마치 야누스의 또 다른 얼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군중의 모습입니다. 불과 닷새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이 이젠 완전히 돌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열광이 이제 예수님을 죽이는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한 사람들의 충동에 의해서 그들의 극단적인 호기심이 죽음을 요구하는 마음으로 뒤바뀌고 마는 군중들의 속성을 알고 계셨기에 애초부터 그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이 변덕스런 군중 앞에 예수님만이 당당하게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군중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 호기심 많고 변덕스런 군중들을 도구로 삼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야심을 이루려 했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은 군중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이러한 군중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음흉한 정치인들, 세계적이라 칭하는 가짜 학자들, 타락한 종교인들, 악덕 경제인들, 거짓 예술가들은 국민들을 군중으로 삼고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웁니다. 군중을 휩쓸고 다니는 사회는 이성을 상실하고 구호와 편 가름으로 술렁대는 사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한 군중심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가니까, 거기에 화끈한 감동이 있으니까 덩달아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지만 그것은 개인적 고백과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서 신앙고백을 통해 확신에 도달하지 못한 신앙은 결국 군중심리의 흥분의 물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군중심리가 바뀌면 신앙도 언제든지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환영하고, 내일은 주님을 배신했던 군중들, 확신 없는 신앙으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신앙의 껍데기를 기웃거리며 몰려다니는 군중 속에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단독자로서 서있지 않고 확신 없고 변덕스런 군중 속에 머무르는 한 이천년 전에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 무리들과 함께 소리 지르고 손을 치켜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공모자들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여전히 저 군중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을 등지고 살았던 삶을 되돌려 하느님 앞에 겸허하게 나아간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반겨주시고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군중이 아닌 ‘나’의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http://www.yongme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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