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이 불여일견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以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아야만 믿겠다는 토마스의 말처럼 사람은 백번 듣는 것보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 하느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욥기 19, 27)
인생의 의문과 고통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고,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과 혼돈을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뵙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아야 합니다. 보는 것이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준다 하더라도, 믿음 그 자체가 보는 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을 뵙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해야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이고, 바로 그런 하느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의 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안(肉眼)이고, 그것보다 발전된 것이 뇌안(腦眼)이며, 그것보다 깊은 것은 심안(心眼)이고, 가장 심오한 것은 영안(靈眼)입니다.
우리가 지닌 네 개의 눈 중에서 어떤 눈으로 사물과 현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욕망의 수단으로 바라볼 것이고, 뇌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생각하고 따지는데 필요한 내용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심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바라보는 현실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눈은 모든 사물 안에 담긴 본질인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 뵙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요한 1, 39)고 하신 것은 보아야만 믿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신앙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현존하셨던 그 분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토마스와 똑 같은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짊어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수 많은 사랑의 기적들을 통해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은 그의 불신을 드러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자체로는 토마스를 탓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일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보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 중 하나는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해서 항상 그보다 덜 중요한 것만을 찾아내기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 앞에 덜 중요한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뵙는 일은 감정이나 이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으며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일, 사랑을 위하여 견디어 내는 십자가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http://www.yongmeori.com)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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