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깨어나 함께 통곡하자
우리나라 산맥들을 그린 지도를 보면, 산들이 선 내지 면으로 처리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산에 올라 본 사람은 모두들 안다. 산이 무엇인지. 산은 선이 아니다. 그것은 면도 아니다. 산은 불규칙 입체, 변화무쌍한 영역이다.
황사영과 지학순 주교
그렇듯이, 황사영은 그 어떤 선이나 면으로 표현될 길이 없는 난세 가운데 난세를 하느님을 바라고 민중의 생명을 바라는 오롯한 마음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선이나 면 넘듯이 쉽게 넘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평생 정도를 걷고자 한 그는 자기의 온 존재를 걸고 한 생의 영역을 살다 간 인물이다. 그의 영역에 뛰어들어서 그와 함께 그 고난의 여정을 되밟아보지 않고는, 그와 함께 백서를 써보지 않고는, 그와 함께 탄식해 보지 않고는 그를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천박한 일일 수 있는가?
황사영은 우리가 인격으로 학문을 하고, 인격으로 영성을 살고, 인격으로 역사를 만나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다. 황사영의 영을 매개로 도리어 역사의 이 변화무쌍한 입체적 영역 차원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열 수 있다면, 이것은 교회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수행할 수 있는 위대한 기여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지학순 다니엘 주교는 황사영을 품어안은 대표적인 사목자였다. 그는 1970년대에 불의한 독재 권력에 맞서다가 국가 전복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옥살이를 했다. 그런 그를 구출해 낸 것이 누구였는가? 그것은 민중이었다.
당시 바오로 6세교황을 비롯한 세계 교회였다. 케네디 의원을 비롯하여 미국 국회의원들이 한국 교회와 민중의 고난을 주시하면서 독재 정권의 수뇌들에게 정의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를테면 이땅의 고난당하는 민중의 한 대변자 지주교의 구속을 무력화시킨 일련의 사건은 황사영이 꿈꾸었던, 정의를 위한 세계 연대의 한 위대한 결과였다.
황사영이 드러내었던 한계는 극복하고 그가 꿈꾸었던 정의를 위한 협력은 모두 실현시킨 존재, 그가 지학순 주교이다. 그 지주교가 말하였다. 황사영이 진정으로 꿈꾸었던 것은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나라를 분열시킨 채 백성을 신음하게 만드는 특권 집단을 하느님이 심판하시고 정의를 바로 세우시는 것이었다고. 황사영을 사랑했던 지주교, 그가 황사영이 묻힌 땅으로 찾아가 그와 함께 잠들어 있다.
황사영과 지주교를 고난에 빠뜨렸던 세력들처럼, 지금도 이 시대의 민중에게 고통을 가하며 허세와 악의가 떠돌게 만드는 부류가 있다. 이런 세력의 구시대 선배들이 황사영과 그의 동료들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권력의 본질을 호도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왜곡한 채 민중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황사영에게 씌운 굴레, ‘매국노’라는 오명을 지금도 되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불의한 지배 세력과 그들의 현대판 후예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채 그들의 죽음의 정치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누가 매국노라고 비판하는가
믿음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고 파괴한 악행을 질책할 줄 모르는 입이나 그 악행과 불의를 탄식할 줄 모르는 영이라면 혹시 모를 일이다. 저 고난당한 사람, 황사영이 자기와 함께 고난당하는 동료들의 아픔을 풀기 위해 온 영과 몸이 짓눌린 채 탄식하며 꿈꾸듯이 쓴 내용을 보라고 손가락질해 가면서 ‘매국노’라고 비판할 수 있을는지. 그러나 성숙한 역사 인식에 도달한 시민 사회라고 한다면,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겪은 아픔을 모르면서 비판의 날을 세울 때, 그것 자체가 이미 반민중적이고 반역사적인 행위가 되고 만다는 것을.
교회야, 민족아, 함께 깨어나자. 황사영과 함께 통곡하자. 하느님 앞에서 정화된 마음으로 교회와 민중이 함께, 실로 해서는 안되는 억압과 폭행을 먼저 자행해 놓고는 그것을 풀기 위한 한 특단의 방책으로 꿈꾼 내용을 가지고 매국 행위라고 비판한 그 세력과 그 세력의 승계 세력부터 뿌리뽑아 가자.
그러고 나서 진정한 한국인이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민족적 가톨릭적 정체성에 충실하게 질문해도 늦지 않다. 그런데 그때 정말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하였던 것인가 하고.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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