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서 쫓겨온 선교사가 교회 일궈
불교 유교 도교 민간신앙이 혼재
복지 교육 문화로 교회인식 개선
[대만=유재우 기자]
아픔 그리고 아픔. 그 속에서 피어나는 연민….
너무 닮아서일까, 마음 속 한 켠이 내내 아릿했다. 대만 역사 속에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아픔의 역사가 녹아있었다. 중국과의 전쟁, 그로 인해 생긴 동포와의 적대감, 그리고 급속한 경제 발달로 인한 빈부격차.
대만의 1980년대 새로운 영화스타일을 일컫는 ‘뉴웨이브’의 선두 주자 허우샤오센 감독은 그가 연출한 여러 편의 영화를 통해 대만 현대사의 굴곡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비정성시’(A City of Sadness/ 1989년)라는 작품에서 허우샤오센 감독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장제스의 국민당 내전 등을 대만의 한 가족을 통해서 바라본다. 그속에서 그는 대만의 정체성 구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대만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대만은 종교의 자유로 인해 불교,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가 분포되어 있다. 게다가 국민들 대부분이 여러 종교가 혼합된 민간 신앙을 믿기 때문에 대만 교회의 정체성 찾기가 더욱 버겁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도 희망은 있다. 중국 선교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 대 사회적 복지·교육·문화 기관 등의 설립을 통한 인식 개선 등으로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다. ‘아시아 교회가 간다 Ⅱ’ 두 번째 국가 대만. 그들의 힙겹지만 희망찬 발걸음에 동행해보자.
아픔의 시작
1626년 스페인 선교사들이 필리핀에서 대만으로 들어왔다. 얼마되지 않아 네덜란드인들이 대만을 점령한 후 스페인 선교사들은 가차 없이 쫓겨났다.
대만 교회의 뿌리가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 후 교회가 싹트기까지 걸린 시간은 200년이 훨씬 넘었다. 1859년 스페인의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까오슝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대만은 그 후 일본의 첫 해외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 기간이 장장 51년. 일본의 통치가 끝난 1949년,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이 대만으로 이전했다.
대만의 정체성은 이미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만 교회에 있어 희망의 서곡이었다. 내전 중 쫓겨난 중국 신부와 외국 선교사, 신학생들이 대만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1천여 명의 사제와 수도자들은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고 각 도시마다 본당과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는 센터를 건립했다. 대부분이 유치원과 교육기관, 병원, 자선기관 등이었다.
당시 대만 교회 신자수는 40만 명에 육박했다. 이때만 해도 대만 교회는 일하 포르모사(Ilha Formosa) 즉 ‘아름다운 섬’ 속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였다.
혹자는 대만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60년대 중반이후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현재 대만 교회는 7개 교구에 신자 수는 30만 명이 조금 안되는 상황.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희망 찾기
눈을 뜨자 도착했다. 1시간의 시차. 화창한 날이었지만 답답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답답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한국외방선교회 대만 지부 이중희 신부(신죽교구 신푸본당 주임)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대만은 처음이시죠?”
“네. 근데 좀 답답하네요. 기후 탓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출발하자는 이신부의 말에 얼른 차에 탔다.
“하늘이 참 맑네요.” “네. 어제까지 6일 동안 비가 왔다 오늘 개었어요. 취재하러 오시는걸 그분이 아셨나보네요.”
대만 교회에 대해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기자는 슬슬 본성을 내보였다. “대만 교회는 어때요?” “뭐가요?” “뭐 교구, 신자 수, 교세통계 등 그런 거 있잖아요.”
어느덧 차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글쎄요. 이제 곧 아실텐데요. 제가 먼저 말씀드려봤자…. 겪어보시는게 낫지 않겠어요?”
10분 후 이신부가 사목하고 있는 성당에 도착했다. 신자는 물론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3개 대학 43개 중고교 운영하며 교회-중국-대만 대화방법 연구”
■인터뷰 / 대만 주교회의 의장 쩡짜이파 대주교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친근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인상.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니 꽤나 놀란 눈치였다.
이왕 놀란 거 직설적으로 물었다. “오면서 보니 불당이 많던데요. 그만큼 민간신앙이 대중적으로 퍼져있다는 것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잠시 침묵. ‘너무 세게 나갔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대만 주교회의 의장이자 타이페이 대교구 교구장인 쩡짜이파(鄭再發) 대주교가 입을 열었다.
“오면서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은 못보셨나보죠? 사회적인 현상으로 인해 작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한 순간 의기소침해졌다. 쩡대주교는 말을 이어나갔다.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대만 교회는 3개의 대학교와 43개의 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복지시설은 교회가 가장 많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통속적으로 국민들에게 퍼져있는 민간신앙을 배척하기보다는, 교회가 그들의 삶에 스며들게 해야한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사실 교회 건립이나 풍격, 전례, 용어 등을 중국인의 감각에 녹아들게 할 필요성이 있긴 합니다.”
중국을 비롯한 대다수의 대만인들이 가톨릭을 서방의 종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연스레 이어진 토착화 얘기.
“교회에서 운영하는 대학교와 중학교 같은 교육기관에서 가톨릭과 중국, 대만 문화 간의 대화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대만의 다양한 종족문화에 교회가 녹아들려는 이러한 노력이야 말로 대만 교회의 토착화의 모습입니다.”
그는 또 대만 교회의 과제로 사제 양성과 평신도 교육을 꼽았다. 과거 중국에서 넘어온 사제들이 현재는 고령이 됐고 성소부족으로 인해 평신도를 교육할 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대만 교회는 현재 수많은 해외 교회와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아주 긍정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죠.”
특히 타이페이 대교구는 대전교구와 자매결연을 맺을 정도로 아시아 연대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회는 국적을 초월합니다. 앞으로 아시아 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입니다. 아시아 교회는 신학생과 사제 등의 교류를 통해 아시아 교회 복음화, 나아가 세계 교회 복음화의 한 축을 담당할 것입니다.”
▨ 대만 개관(2005년말 현재)
- 인구: 2289만 4384명
- 1인당 GNP: 1만 2570달러(2003년 기준)
- 면적: 3.6만㎢ (남한의 약 1/3)
- 기후와 기온: 남부는 열대지방, 북부는 아열대지방. 연평균온도는 약 23℃, 연강우량은 약 4400㎜ 로 연중 고온다습.
- 산업구조: 농업 1.71%, 공업 25.13%, 서비스업 73.16%
- 종교: 불교,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 존재. 민간신앙이 널리 유포돼 불교와 유교, 도교 등의 혼합형태가 많음. 거의 모든 가정이나 길거리에 불당을 차려놓고 아침, 저녁마다 우상 앞에서 ‘바이바이’(신들에게 예배하는 행위)라는 의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음. 가톨릭신자는 전체인구의 1.3% 정도인 29만8028명.
사진설명
대만의 종교는 민간 신앙 위주다. 흔히들 태어나서는 사주팔자를 보고, 글은 사서오경을 읽고, 죽어서는 불교식 장례를 치른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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