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에 퍼지는 희망의 찬가
대부분 열악한 서너평 쪽집에 거주
서울 빈민사목위 공부방 등 운영
외부 전문가 초빙 주민 교육 장 마련
비닐과 천을 얼기설기 엮어 올린 지붕과 너덜너덜한 판자로 벽체를 이어붙인 집들은 걷어차면 통째로 넘어갈 것만 같다. 본격적인 더위가 오기 전인데도 악취를 뿜어내는 오물투성이 개천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진다. 색바랜 옷들이 널린 빨랫줄, 동네를 배회하는 비쩍 마른 강아지는 영락없는 1960년대 판자촌 바로 그 광경이다. 마을 귀퉁이 공동화장실도 그때 그대로, ‘화장실’이라고 쓰인 문짝을 젖히면 나무 발판 두 개가 달랑 놓여 있다.
인근 대모산 산행에 나선 등반객이 길이라도 잘못 들어섰다가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는 세트장이라고 착각할 법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남의 부를 상징하는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직선으로 불과 1.3㎞거리에 있는 곳에서 이런 광경이 펼쳐지리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570번지 일대를 일컫는 구룡마을은 그렇게 반세기를 뛰어넘는 괴리감과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유령 마을?
머리를 맞대듯 다닥다닥 지붕을 맞댄 판잣집들은 몇 가구나 사는지 가늠하기조차 힘들게 한다. 언뜻 여느 시골마을처럼 한가롭게까지 보이는 마을의 판잣집들은 높이가 사람 키를 크게 넘지 않는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은 꿈도 꿀 수 없는 듯 근근이 시멘트로 포장된 길도 얼마 이어지지 못하고 군데군데 끊기며 질척이는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룡마을은 행정지도 어디에도 표시돼 있지 않다. 주민 대부분이 사유지를 불법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대별 주소도 없다. 이른바 유령 마을이다. 동사무소나 치안센터, 소방서 같은 기본적인 행정기관은 물론 흔하디흔한 학원이나 오락실 하나 없다.
남의 땅에서 살다보니 마을 주민들은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자신이 살고 있는 개포동으로 올리지 못하고 인근 교회나 일하는 식당, 친척집 등으로 위장전입을 해놓고 있다. 주민자치회가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등재하려고 행정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그마저 기각되고 말았다.
국내 최대의 판자촌
구룡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86년 7월, 88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정부가 대대적인 빈민가 철거작업을 벌이면서였다. 하루아침에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이 산자락 아래 하나둘 모여들어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를 지으면서 시작된 마을은 1988년 규모가 급격히 커져 현재 17만여평에 2천여 가구가 사는 국내 최대의 판자촌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 서너평인 쪽집에 사는 주민들의 삶은 ‘열악함’ 그 자체다. 주민의 80% 이상은 아직도 재래식 공동화장실을 쓴다. 상수도도 들어오지 않아 지붕 위로 플라스틱 파이프를 연결해 물을 끌어다 쓰고 있지만 그마저 수시로 터져 밥 지을 물을 구하지 못할 때도 있다. 1960년대에서 진화된 것이 있다면 LP가스통과 전기가 들어왔다는 것 정도. 학생이나 젊은 사람이 있는 가정에서는 인터넷을 끌어오기도 했다.
현재 2000여채의 판잣집 가운데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1000가구 정도. 절반 정도는 비어 있는 셈이다. 비어 있는 집도 마을에서 인정하는 ‘주인’은 다 있다. 판잣집 입구마다 마을자치회에서 만든 주민 명표가 붙어있어 주소도, 건축물 대장도 없지만 ‘주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웅변해주고 있다. ‘주거 주민’과 ‘딱지 주민’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주민 갈등 깊어지는 구룡마을
마을에는 80년대 중반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구룡마을자치회(마을자치회)’와 지난 1999년 만들어진 ‘구룡마을 주민자치회(주민자치회)’ 등 2개의 자치회가 활동하고 있어 복잡한 속사정을 엿보게 한다.
마을이 생길 당시부터 자치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기요금 같은 공과금을 수납하는 일이었다. 무허가 비닐하우스다 보니 집집마다 전기계량기를 달지 못해 자치회가 대신 9개 지구마다 변압기 1대씩을 설치해 전기요금을 걷어 대납했다. 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공과금을 걷다 보니 일부 자치회 간부가 이를 횡령하는 일이 생겨나면서 주민의 원성을 샀다. 이 과정에서 1999년 7월 2지구 100여채에 불이 난 사고를 계기로 자치회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구룡마을 주민자치회’를 구성해 떨어져나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치회의 분리로 구룡마을 주민들도 반으로 갈려 공과금도 따로 낼뿐 아니라 재개발 등 마을 운영방향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고 있다. 갈등이 최고 수위에 올랐을 때는 두 단체가 상대방의 본부격인 마을회관과 자치회관을 중장비를 동원해 부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마을 초입에 100여 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는 양쪽 회관 사이에는 남북한을 갈라놓고 있는 휴전선을 연상케 하는 긴장감이 감돈다.
다시 들이닥치는 ‘개발 유령’
구룡마을에 다시 ‘개발 유령’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마을주민들 사이에는 골이 깊어가고 있다. 개발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경. 5년이 지난 지금은 강남의 마지막 노른자위 땅으로 불리면서 마을 전체가 들썩이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마을주민 상당수가 자신들의 미래는 물론 현재의 처지를 명확히 볼 수 있는 시야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주민 상당수가 노인이거나 배움이 부족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법적으로 토지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발이 되기만 하면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수 있으리라는 허망한 꿈을 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난 때문에 이곳을 택한 ‘주거 주민’들 가운데서도 언제부터인가 이른바 ‘딱지’(아파트 입주권)를 기대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 2000년 한 자치회에서 주민들의 전출입을 관리하기 위한 주민(회원)증을 발급하고 이 주민증이 ‘딱지’로 인식되면서 한 장에 수천만원씩에 거래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양분된 주민들 사이의 골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깊어졌다. 이런 일의 이면에는 대부분 개발 브로커나 부동산업자들이 있다. 주민들도 어렴풋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생관계를 어쩌지도 못한 채 더욱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자란다
옛 구룡마을자치회관은 마을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자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바로 회관 1층에 자리잡은 ‘구룡바오로공부방’ 때문이다. 공부방은 풀 방구리 드나드는 쥐처럼 쉴 새 없이 오가는 아이들로 하루 종일 분주하다. 지난 2002년 2월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전개해오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현장사도직 프로그램인 ‘바울로계획’의 일환으로 인경희(모니카.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를 비롯한 몇 명의 수녀들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일기 시작한 변화다. 처음엔 무슨 일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돈벌이 나간 사이 갈 곳 몰라 하는 아이들을 하나둘씩 모아 자신들의 비닐하우스에서 밥을 챙겨 먹이고 놀아주기 시작했다. 오후 서너시가 돼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수녀들의 방은 공부방으로 변했다. 처음엔 “수녀들이 이곳엔 왜 왔냐”, “성당 지으려고 그러냐”며 경계하던 마을에서도 회관 한쪽을 내줘 놀이방이 꾸며지고, 이젠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공부방도 생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발적으로 공부방을 찾고 있는 아이들이 30명이 넘는다.
지난해 5월에는 7살부터 중학생까지 40명 가까운 아이들로 스카우트도 만들었다. 스카우트 활동을 하며 아이들의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띠어 가고 있다. 아이들의 마음이 수녀들에게 쏠리자 자연스레 부모들의 마음도 모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들에게 스카우트 지도자 훈련 등을 시켜 아이들과 함께 활동을 하게 하면서 마을 주민들 사이에는 드러나지 않는 변화가 하나씩 자리잡아 가고 있다.
“많이 변했죠. 자기 주장을 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챙길 수 있게 됐다는 것 자체가 이들로서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모니카 수녀는 그간의 변화가 대견스러운 표정이었다. 피해의식으로 외지인들에게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면서 지난해엔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마을이 형성되던 초기부터 구룡마을에서 살아오고 있는 마을자치회 김병찬(미카엘.49.서울 개포동본당) 회장은 “수녀님들과 봉사자들의 조그만 몸짓들이 일으키는 변화가 무지 속에 살아온 주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며 “미래에 희망을 갖지 못하던 이들이 희망을 찾는 모습이 조그만 기적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학교를 파했는지 공부방 문을 열고 우르르 들어서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향해 연신 행복한 미소를 보내는 모니카 수녀, 자신의 아이인 양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맞이하는 봉사자들의 모습에서 풋풋한 희망의 내음이 전해져왔다.
사진설명
1960년대를 연상케 하는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의 전경이다. 이 마을 너머로 보이는 인근의 높다란 건물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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