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게 ‘죽음’ 선택 강요하나?
현대의학의 발전은 예전에는 고민하지 않았던 많은 윤리적 문제들을 안겨 주었다.
‘생명의료윤리학’이란 이런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과 씨름하는 학문이다. 1970년대 낙태 논란을 시작으로 하여 안락사, 죽음의 기준, 장기 분배의 문제, 의사와 환자의 관계 등을 다루어왔고, 최근에는 유전공학의 발전에 따른 유전자 검사와 치료의 문제, 우생학의 문제, 그리고 한국에서도 첨예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인간배아연구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윤리적 원칙 맞서기도
생명의료윤리학에는 몇 가지 주요한 윤리적 원칙들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여느 철학적 문제들이 그러하듯 팽팽히 맞서는 입장들을 목격하게 된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대격돌이라 불릴 만한 이견들 속에서 무엇이 과연 올바른 견해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몇 안 되는 국내 생명의료윤리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은 엄연히 발생하고 있다. 가톨릭 신앙을 지닌 학자로선 종교적 언어가 아닌 학문적 언어로 이들 논란에 뛰어 들어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고민도 크다.
인간배아연구에 대한 찬반 논란 역시 이런 총체적 관점의 격돌이다. 그 어느 누구도 건전한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인간 생명 존중’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 생명’을 이해하는 입장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언제 인간 생명이 시작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철학적 이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아연구를 찬성하는 한 입장은 세포 단계의 배아를 아예 인간 생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일란성 쌍생아 연구에 기초할 때 배아가 여러 개체의 인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국제적으로도 한 개체의 동일성이 확립되는 대략 수정 후 14일까지 연구를 허용하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배아가 한 개체로 발전하느냐 여러 개체로 발전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배아를 ‘인간 생명’으로 보는 이유는 몇 명으로 분화될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바로 이 배아 역시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 종의 유전자를 지닌 생물체이기 때문이다.
안락사, 자율적인가
비슷한 문제가 환자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안락사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사실 어느 누구도 자율성의 가치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환자라도 판단능력을 상실하지 않은 한, 자율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특히 죽어가는 환자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하는 것은 인간 존재로서의 존엄한 가치를 확인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환자의 판단이 자율적 판단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단순히 치료의 선택을 넘어선 죽음의 선택이 자율적 판단의 범위에 놓일 수 있는지조차가 문제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철학적 문제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왜 죽음의 길에 들어선 몇몇 환자들이 죽음을 앞당기고자 하는가이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율성이란 미명 아래 자신의 본 마음을 숨기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죽음은 단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기도 하다. 죽어감도 죽음도 삶의 일부이다. 죽어감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작별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만약 사랑하는 이들과의 작별을 서두르게 하는 것이 돈 때문이라면 이처럼 서글픈 일은 없을 것이고 이처럼 인간 생명의 가치가 짓밟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학의 발전은 우리의 삶에 ‘죽어감’이란 중요한 시기를 안겨주었다.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생명 존중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작별이 의료보험제도의 미비로 서둘러지지 않게 하루 빨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최경석(가톨릭대 교양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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