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체성 존중못한 비극
하느님의 세 위격이 자유롭게 서로 존중하며 이루시는 소통에서 토착화의 원형을 보았다. 삼위의 하느님께 닿은 깊은 영성이 깊은 토착화를 발생시키는데, 우리는 자유와 존중, 주체성과 연대에 근거한 깊은 토착화의 한 전형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로 사도들과 지도자들이 모여서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미래의 발전 방향을 논의한 사건이 있었다. 사도행전 15장이 전하는, 할례와 음식 규정 등에 관한 예루살렘 회의가 그것이다.
‘유다-비유다’ 문화갈등
이 회의가 개최된 배경은 바오로의 선포와 연관되어 있다.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데 선봉에 섰던 사울이 하느님 안에서 거듭나면서 ‘바오로(Paulus)’로 명명되었다. 이 이름은 ‘작은자’, ‘짧은자’, ‘못갖춘꼴’을 뜻한다. 그리스도 공동체를 세계에 매개하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나게 하였던 것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 영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정황 속에서 유다 전통과 비유다계 문화의 차이로 신앙 실천의 정도를 놓고 갈등이 발생하였다. 유다계 공동체에 속한 일부 사람들이 안티오키아로 와서 율법이 명하는 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바오로 역시 유다인이었는데, 유다계 공동체의 관점을 존중한다면서 새 공동체의 삶의 문화를 바르게 존중하지 못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그때 유다계 강경파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고 말았다면, 후대의 교회 모습은 어땠을까?
이런 가정이 무익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황사영 사건을 보면서 언급하였듯이, 동아시아 복음화 역사에서 제사 문제로 이와 유사한 문화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때 새 공동체는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뒤흔드는 형태로 내려진 결정에 의하여 극도의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제사 논쟁은 1640년대부터 100년 가량 지속되었다. 이것은 당대의 지도자들이 나름대로 이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동아시아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 마테오 리치처럼, 바오로가 수행한 것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선교 현장에서 동아시아인들과 살면서 제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이를 그리스도 신앙 전통과 병존하게 하려는 분명한 의지와 비전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새 공동체를 대변하여 유럽 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화의 필요와 관용의 덕을 역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유럽 교회 지도자들과 일부 선교사들은 끝내 이를 외면한 채, 1742년에 최종적으로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죄하였다. 그리하여 바티칸은 제사를 금하고, 중국은 서교를 막는 대립을 낳기에 이르렀다.(제사 논쟁에 관해서는 황종렬,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에 관하여’, 신앙과 삶 7, 2003, 163∼7 참조)
말하자면, 문화적 정체성을 존중할 줄 몰랐던 교회가 존중받지 못한 지역 사회에 의하여 종교의 존재 의의 자체를 거부당하면서 연대의 틀을 확보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했던 것이다.
토착화 관심갖고 선교 준비
오늘 이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현대의 중국이 자유 선교를 막는 것을 비판해 왔다. 과거나 지금이나 차이나가 자신을 ‘중국(中國)’이라고, 곧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나라들을 낮추보는 오만을 간과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 사람들이 선교를 금하는 가장 근원적 원인 가운데 하나가 교회 지도자들이 과거에 보인 종교 문화적인 우월과 파괴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실로, 이런 반성적 성찰 없이는 앞으로도 동아시아 선교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단적으로, 과거 교회는 제사 관습을 포용할 사목적, 영성적 비전에 따라서 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실천 대안을 제시할 만한 토착화의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다. 이 역량 부족은 단순히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본질인 선교와 복음화를 충만히 수행하지 못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동아시아를 복음화하려면, 동아시아 선교 역사와 토착화에 좀더 관심을 갖고 더욱 더 면밀하게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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