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체성 갖고 신앙 수용
삼위의 하느님이 나누시는 대화와 우주 만물에게 당신들의 뜻을 전달하시는 계속된 계시와 소통이 토착화의 원형이라고 하였다. 사람 편에서 보자면, 토착화란 하느님의 창조적 소통에 응답하여 삼위의 하느님이 서로에게 지니신 존중과 자유에 따라서 교회의 신앙 전통의 비추임 하에 온 생명계와 더불어 그분의 생명의 질서를 이루어 가는 시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위의 하느님의 자유와 존중, 주체성과 연대를 토착화의 양 날개로 파악하게 된다.
유다인의 관습 ‘할례’ 강요
어느 교회에서든지 진정한 자유와 존중 없이 토착화는 이룰 수 없다. 자유는 지역 교회의 주체성의 원천을 이루고, 존중은 연대의 토대를 이룬다.
제사 문제에서 본 것처럼, 지역 신앙 공동체의 자유와 주체성을 바로 보존하는 틀이 없이는 토착화의 정상(正常도 頂上도)을 성취하지 못한다.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순명을 요구하며 독단적인, 혹은 일방적인 교회 부식에 집착할 경우, 존중과 연대는 깨어지고 깊은 토착화를 달성하기란 매우 어려워진다.
자유와 존중, 주체성과 연대에 근거한 토착화의 한 전형을 사도행전 15장이 전하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유다계 구성원들이 안티오키아의 새 신앙 공동체를 찾아가서 구원을 받으려면 유다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은 지난번에 언급한 대로이다.
이런 문화적 충돌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조건에서 비롯되는 이같은 갈등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있지, 이런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당시 신구 공동체들은 저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당시 바오로 사도를 비롯하여 새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문제의 핵심을 포착해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논의를 펼쳐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새 공동체 신자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보내기에 이르렀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사도 15, 23∼29)
구원은 은총을 통해서
이것은 할례나 유다교식 음식 규정을 따르지 않더라도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서 구원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베드로가 선언하였듯이, 유다계건 그 밖의 그리스도인이건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이지 유다교식 율법에 복종해서가 아닌 것이다(11절). 이렇게 해서 유다계 공동체는 자신들의 풍습 밖에 있던 새 신앙 공동체에게 옛 관습을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대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팔레스티나 밖의 신앙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고 하였다.(31절) 이것은 안티오키아 등의 공동체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과 불륜을 피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의무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신구 공동체들은 “무엇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이게 하는가”에 대한 응답 과정에서 서로 문화-사회적 정체성을 지켜가면서도 예수의 직제자 공동체의 신앙 비전을 수용하여 함께 연대하는 기풍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실로, 예수의 제자 신분을 살아가는 데 비본질적으로 요청되는 것들이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인정할 결단이 없이는 새로운 문화 상황에 부응하는 형태로 계시된 진리를 바르게 살아가기 어렵다. 새 참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다스림의 가치들을 자신의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자유를 수락하고 존중하는 영성적 성숙함이 살아 있는 공동체, 토착화는 거기에서 비로소 아름답게 성취될 따름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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