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화 주체는 삼위의 하느님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토착화란 하느님이 온 생명계에 전달하시는 당신의 생명의 질서를 뿌리내리게 하는 데서 비롯한다. 하느님의 이 근원적 토착화는 온 생명계를 향한 부름을 발생시키는데, 교회를 포함한 온 인류의 생명살이로서 토착화는 하느님의 이 지속적 창조에 대한 응답이다.
이런 관점에서 토착화를 삼위의 하느님의 창조적 소통에 응답하여 그분들의 존중과 자유에 따라서 교회의 신앙 전통의 비추임 하에 온 생명계와 생명의 질서를 이루어 가는 시도로 보았다.
질적 문제가 논의대상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토착화 없는 교회는 없다. 토착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토착화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아도, 심지어는 토착화를 외면하고 가로막는다고 하더라도, 그들 가운데서조차 토착화는 진행 중이다. 토착화를 거부한 채 지역 문화를 파괴하더라도 토착화가 이루어져 온 중남미나 아시아 교회의 역사가 이 사실을 증거한다.
문제는 어떤 토착화인가에 있을 따름이다. 성숙한 유형의 토착화인가 아닌가, 질적으로 훌륭한 토착화인가 아닌가, 그것이 문제이지, 토착화가 필요한가 아닌가는 이미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당신의 창조를 지속시켜 가시는 한, 이 근원적 토착화가 삼위의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한, 거기에 응답할 온 생명계와 그리스도교회의 토착화는 항구하게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토착화에 관한 기본 사항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토착화의 주체는 오랜 동안 그리스도 신앙 전통에서 선구적 역할을 해온 서구 그리스도 교회인 데서 그치지 않는다. 토착화의 근원적 주체는 오히려 삼위의 하느님이시고, 그분들의 생명의 통교와 생명의 질서의 소통에 응답하는 온 생명계가 하느님의 원대한 토착화의 동반자로 들어서 있다.
이런 근본 토대 위에서 서구 교회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가톨릭 지역 교회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다스림을 자신과 이웃과 온 생명계를 살릴 에너지로 작용시켜 가는 주체로 서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당연히 하느님께 생명을 받아 존재하는 모든 실체의 삶의 자리가 토착화의 맥락이 된다. 기본적으로 우리 교회의 경우 이땅의 역사와 문화, 사회와 정치, 경제 관계 속에서 우리 민족이 직면한 삶의 현실이 구체적으로 토착화의 기본 맥락을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 부합한 토착화
또한 이같은 토착화의 지평에서는 서구 교회 역시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토착화의 사명을 고유하게 띤다는 점이 보다 더 선명해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야말로 특히 서구 교회가 온 교회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달라진 종교-문화-사회 현실 속에서 자기를 토착화하기 위하여 투신한 가장 결정적인 모델이었다. 이 사실은 토착화란 서구 교회가 선교사를 파견하여 선교하던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서구 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회, 5대양 6대주 모든 곳의 교회에서 필요한 회피 불가능한 사명이자 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서구 교회 역시 21세기에 부합한 형태로 끊임없이 토착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토착화에 대한 이러한 이해 지평에서는 단순히 서구 공동체들이 시도한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해석과 그 집적물을 다른 지역 교회들이 전달받아 이식하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토착화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건강한 신앙 전통으로 매개된 삼위의 하느님이 바라시는 생명의 질서인 것이다.
지역 교회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육화시켜 가는 과정에서 당연히 고유한 역사와 문화의 주체로서 자기 민족이 형성해 온 하느님의 생명의 질서에 대한 건강한 이해와 그러한 이해의 실현물을 그 다스림으로 해석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통합해 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이성과 실천의 통합적 토착화 과정에서 당신의 육화와 가르침과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구원에 이르도록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이같은 구원의 관점에서 토착화란 그리스도의 육화로 절정에 이른 삼위의 하느님의 토착화에 대한 응답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뿌리내림(inculturation into the bosom of God)’이자 ‘하느님 생명에의 참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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