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 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다
좋은 건 알지만 피정에 참여하는 신자는 적어
누구나 쉴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 개발 필요
쉼표. 낯설다. 어느덧 우리는 쉼표를 잃어 버렸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다. “왜 사느냐”라고 물으면 “…” 대답이 궁해진다. 동양 산수화의 준법, 공(空), 무(無), 허(虛)는 더 이상 우리들 삶의 텍스트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외롭고, 힘들고, 지친다. 하지만 더 이상 좌절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삶의 목적을 잠시 잃고 방황하는 사춘기 청소년, 갑작스레 찾아온 ‘상실감’으로 삶의 의욕을 잃은 어머니, 앞만 보고 달리다 잠시 뒤를 돌아보고 싶은 아버지. 예수님을 따라하면 된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 그것을 우리는 ‘피정’이라고 부른다.
# 10년만에 웃음 되찾아
40대 중반의 김 스텔라씨. 남편의 외도와 낭비벽 때문에 10년 넘게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았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큰 맘 먹고 1박2일 시간을 내 피정의 집을 찾았다. 시계를 풀렀고, 핸드폰 전원도 껐다. 가정사를 모두 잊고 성체 앞에 앉았다. 하느님께 의탁하며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영적 상담을 하고, 성서를 읽고, 고해성사를 받았다. 남편에 대한 미움도 모두 털어냈다.
그 후, 하느님 사랑을 체험했다. 행복이 밀려들었다. 10년 넘게 잊었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가족도 변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세례를 받았다. 스텔라씨는 “피정 한번 한 것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했다.
# 욕심 걷어내자 행복
50대 초반의 황 이냐시오씨. 작은 개인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아침에 일터로 나가 저녁에 문 닫고 돌아오는 반복적 일상. 때때로 친구들 만나 술 한잔 마시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이다. 주말이면 혼자서 등산도 해 보았고, 자전거와 축구에도 취미를 붙여봤다. 하지만 뭔가 허전했다.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서 피정의 집을 찾아 2박3일 동안 지난 삶을 되돌아 봤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하는 자잘한 개인적 욕심들을 털어내기로 했다. 그리고 작은 습관부터 하나둘 고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행복이 찾아왔다.
이냐시오씨는 “2개월에 한번씩 개인 피정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피정’은 이냐시오 씨가 체험을 통해 얻은 ‘행복 방정식’이다.
# 피정이 무엇이길래
스텔라씨와 이냐시오씨는 ‘삶에 지친 신자들은 피정의 행복에 한번 푹 빠져보라’고 권한다. 그런데 신자들은 묻는다. “피정이 뭐예요?”
7월 6일 인천 남동구 만수5동 성 안드레아 피정의 집(원장 김태건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여름인데도 에어컨이 필요없을 정도로 시원했다. 우람한 나무와 넓은 잔디밭, 그리고 새소리…. 정말 세상 걱정 훌훌 털고 한 2~3일 쉬기에는 딱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개인 피정자에게는 숙식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이곳을 찾는 신앙인은 극소수다. 일주일에 2~3명. 이같은 현상은 다른 피정 시설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본당 단위에서 실시하는 일일 피정이나 각종 교회 기관에서 실시하는 단체 피정을 피정의 범주로 포함할 수 있지만, 특강 혹은 강의 형식으로 이뤄지는 일방통행식 강좌는 정확한 의미의 피정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피정을 하는 신자가 이처럼 극소수에 불과한 것은 왜 그럴까. 관계자들은 우선 “신자들이 누구나 찾아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디에 가면 편히 쉴 수 있다”는 정보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개인 피정 문화의 부재’를 들 수 있다. 개인 피정이 보편화 되지 않다보니, 개인 피정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또 신자들이 피정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도 피정 인구가 적은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회 서울 우이동 명상의 집 오성균 신부는 “피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혼동이 피정의 가치를 축소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며 “많은 이들이 진정한 피정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인천 성 안드레아 피정의 집 김태건 신부는 “불교의 사찰체험 등 각종 선 수련이 보편화 되고 있지만, 가톨릭교회에선 신자 개개인이 사회안에서 살아가며 활력을 얻을 수 있는 맞춤형 개인 피정 문화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며 “진정한 의미에서 신자들이 언제든지 찾아가 편하게 쉬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적극 홍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피정이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피정(避靜, recollectio)은 신앙인들이 일상을 피해 일정기간 동안 조용히 자신을 살피며 수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성 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일정기간 동안 묵상과 성찰의 기도 등과 같은 종교적 수련을 행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한다.
합성어인 피정은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이라는 설과 피세정염(避世靜念)의 준말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피속추정은 ‘세속을 피해 고요함’을 따른다는 뜻이고 피세정염은 ‘세상을 피해 고요한 마음을 지닌다’는 뜻이다.
피정은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했던 일을 그의 제자들이 본받아 수행하게 되면서부터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피정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그의 책 〈영신수련 Exercitia Spiritualia〉에서 피정의 구체적 수련 방법을 발전시키면서 부터다. 이후 많은 성인(聖人)들로 인해 피정은 더욱 확산되었으며, 17세기에는 ‘피정의 집’이라는 특정한 기도의 장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현행 교회법 규정에는 피정의 기간과 방법 등이 언급되어 있지 않는데, 다만 신학생은 매년 피정을 해야 하고(교회법 246조 5항), 수도자 역시 연례 피정을 성실히 해야 하고(663조5항) 재속회원도 연례 피정기간을 준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반면 성직자는 개별법의 규정에 따라 영성피정을 하도록 하고 있다.(276조2항4호)
사진설명
인천 성 안드레아 피정의 집을 찾은 신자들이 묵상을 하며 신앙 안에서새로운 희망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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