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열고 예수님 받아들일 때
진정한 그 분 표징 발견할 수 있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심(7, 31~37)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물리적으로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물론이고, 남의 나라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결정적인 순간에 낭패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고통의 심각성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오죽하면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고 묘사된다(이사 35, 5~6 참조).
예수님께서 이방인 땅(띠로, 시돈, 데카폴리스)에서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형적인 치유 이적사화의 양식에 따라 상황묘사(31~32절), 기적적 치유(33~34절), 치유실증(35절), 목격자들의 반응(37절) 순으로 소개된다. 이제 유다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서 만인에게 구원이 펼쳐진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다(33절).
그러나 결정적으로 병의 치유가 이루어진 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때였다(34절).
예수님의 기적 행위는 신비한 일을 묘사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지게 될 구원사건이 예수님을 통하여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약속된 구원의 기쁨이 모든이에게 결정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37b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이 사건을 보고 사람들이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a절)고 말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하신 말씀(창세 1, 31), 그리고 종말에 모든 것이 새롭게 되리라는 묵시적인 말씀(묵시 21, 5)을 연상케 해줌으로써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와 예수님이 새로운 창조의 주인이심을 은연중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아람어 “에파타” 곧 “열려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다는 말이 되기에 초대 그리스도교에서 세례식 때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11. 두 번째 먹이심(8, 1~21)
사천 명을 먹이심(8, 1~9)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첫 번째 빵의 기적 사건이(6, 34~44) 이제 이방인에게도 주어진다. 두 이야기의 구조와 주제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군중을 가엾이 여기심, 제자들과의 대화, 외딴 곳에서 빵과 물고기로 하는 식사, 배불리 먹고 남음, 많은 군중 등),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이 유다인과 이방인, 곧 서로 다른 공동체 안에서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빵의 기적사화에서는 나누어준 빵의 숫자가 다섯 개가 아니라 일곱 개이고, 남은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아니라 일곱 바구니로, 빵을 먹은 사람의 숫자가 오천 명이 아니라 사천 명으로 나타난다.
열둘이라는 숫자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관련이 있다면, 7이라는 숫자는 가나안 땅 이방의 일곱 민족(신명 7, 1)이나 예루살렘의 헬라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책임 맡은 일곱 명의 보조자들(사도 6, 1~7), 곧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표징 요구를 거절하심(8, 10~13)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신다(10절). 달마누타 지역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하고 하늘에서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태도는(11절) 그 옛날 하느님을 시험한 광야 세대의 행동을 연상케 한다(민수 14, 11. 22 참조). 하느님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은 애초에 들을 마음이 없다.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허락하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표징이 보일리 없다.
자기 생각과 아집으로 꽉차 있으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꼬투리를 잡겠다는 속셈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무상의 선물로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전 인격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표징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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