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입’ 제대로 열어야
지난 호에서 입으로 하는 토착화 수준의 어두운 면을 보았다. 하지만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이 있는 법이다. ‘입으로’ 하는 토착화의 밝은 면을 위해서는 ‘입’을 가벼이 보지 않는 신학과 영성의 깊이가 필요하다. 입은 몸의 한 부분인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입은 온 몸이 몸이게 하고, 영이 영이게 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입은 인간 전체와 존재 차원의 상호 순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입의 존재 차원
20세기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끄는 〈침묵〉에서 ‘입의 존재 차원’을 가슴 저리도록 아프게 증거한다. 교우촌에 관리들이 나타나서 세 사람을 관가로 보내라고 하였다. 만일 응하지 않으면 마을 사람이 모두 신자임을 자백하는 격이기 때문에, 이치소오와 모키치, 그리고 기치지로가 관가로 갔다.
관리들은 예수상을 밟게 하고 예수와 마리아를 모독하게 하였다. 기치지로는 시키는 대로 상을 밟고는 자기의 영에 어긋나게 모독하는 말을 하고 바로 풀려난다.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떨리는 발로 예수상을 밟기는 했어도, 끝내 자신의 신앙과 영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은 채 죽임을 당한다.
일본 지배자들은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하고 예수상을 밟는 것을 ‘형식’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이들의 신앙살이를 돌보았던 로돌리코 신부를 체포한 후 예수상을 밟도록 종용하면서 관리가 말했다. “그냥 형식뿐이다. 형식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닌가. 겉으로 밟기만 하면 된다.”
일본 지배자들은 ‘형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다. ‘형식’이 정신을 장악해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입이든 발이든, 자기의 영에 부합하지 않은 형식을 따를 때, 그 ‘형식’이 영을 으스러뜨려서 신음 덩어리로 만들고 영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다. 입은 존재의 차원을 갖는다. 예수를 모독하는 입이 저 신자들에게 영의 신음을 불러들인다. 일본에서 몇몇 사람이 어느 한 때 이런 아픔을 겪은 것이 아니다. 거의 300년간 1870년대 초까지도 이같은 영의 신음이 지속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때문에 숨죽인 채 은밀하게 신앙을 지키며 살아야 했고, 신자가 아닌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권력자들이 시키는 대로 성화상을 수도 없이 밟으며 그리스도인을 멸시하고 박해해야 하였다.
이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민중의 분열, 일본 민족의 영의 분열.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짓밟는 일을 시키는 대로 계속 할 수밖에 없는 비주체화가 불러온 재앙이 이것이다.
저 오랜 배반의 역사를 통하여 일본 민중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그들의 정신적 비굴과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의 인격을 강제로 주입해 왔다는 것을 저 지배자들이 알까?
종교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내용과 형식의 토착화를 이루지 못한 채 이국적 방식에 맞추도록 강요되는 날들이 장기화될 때, 이때 그 지역 교회 구성원들의 영의 분열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문화적·영성적 괴리
이 분열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기 쉽다. 그러나 분열을 감지하더라도 남는 사람들은? 그들은 한편으로는 신앙의 축복에 감사하고 그 기쁨을 노래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서구식 사목과 영성과 전례의 내용과 틀 하고 그들 자신의 문화적, 영성적 정체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괴리에 짓눌려 끊임없이 신음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정체성의 혼동과 갈등을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과 우리의 민중 신도들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누가 더 오래 이같은 부조화를 정상적인 것으로, 혹은 견딜 만한 것으로 보겠는가? 김수환 추기경의 고백에 비추어볼 때, 성직계보다 평신도와 수도자들이 먼저 입을 열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준거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외침이 폭발하고 나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안 움직이는 것보다야 당연히 낫겠지만, 그때는 너무 늦을 수 있다. 아직 견디고 있을 때, 그 견뎌주는 믿음의 인내에 감사하면서 먼저 준비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신앙 공동체의 입을 제대로 열어서 신학과 영성의 ‘소통’을 건강하게 돌보고, 동아시아 복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도, 그럴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성직자, 그런 수도자, 그런 평신도들을 보다 더 적극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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