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막히면 겸허히 청해야
지난 호에서 ‘입으로’ 하는 토착화의 존재 차원을 역사의 현실과 연결지어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토착화를 하느님의 사명을 실천하는 방식과 연관지어 성찰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지난번에도 시사한 것처럼, 토착화를 말하는 이들에게 ‘언로’가 열려있게 하는 것이다.
교회 언로 막혀선 안돼
실로, 교회의 언로가 막혀서는 안된다. 그렇게 될 때, 토착화가, 그리고 성숙한 신학 작업과 영성의 언어화가 위축당하기 쉽다. 말할 수 있는 신학적, 영성적, 사목적 권리와 책임을 우리의 교회 구조에서 어떻게 올바로 지켜갈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두 사례를 들고자 한다. 하나는 하느님의 생명의 구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마음에 품은 것을 살아가는 프란치스코의 말하는 기품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이 정도를 벗어난 상황에서 비판을 바르게 전달함으로써 비판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랑을 완수해가는 정약용의 비전에 관한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자신의 복음화 사명을 실천할 의지를 갖고 있고, 그 의지를 구현할 방법을 모색해 간다. 그런데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렇게 가슴에 품은 것을 실현해 갈 때, 사회와의 관계에서 가로막히는 사태를 체험해 왔다. 황사영 사건은 그 실상의 한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고, 지난 호에서 본 일본 가톨릭 교회의 역사에서도 이런 면을 나름대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가로막힘 현상은 교회 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한 신앙 주체가 복음화 사명과 관련한 자신의 비전을 구현하고자 할 때, 교회 당국으로부터 제약을 당할 가능성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런 일이 발생하였을 때, 가로막힌 주체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복음화의 실천 과정에서 이를 가로막는 지도부에 응답하는 한 양식을, 세계 교회 차원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루는 프란치스코가 이탈리아 북부 도시 볼로냐에 인접한 이몰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 지역의 책임자인 알디제리 주교를 찾아가서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게 해줄 것을 겸손하게 청하였다. 그러자 주교는 무뚝뚝하게 이렇게 답하였다. “형제여! 내가 나의 신자들에게 설교하는 것만으로 넉넉하오.” 주교의 이같은 응답에 프란치스코는 겸손하게 절을 하고는 물러나왔다.
그런데 한 시간이 채 안 되어서 다시 주교를 찾아갔다. 주교는 프란치스코가 성가시게 군다고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또 무슨 용무로 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공손하게 답하였다: “주교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한 문밖으로 내던져도 그는 다른 문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꼬 대전기, 6장 참조)
토착화는 갈등 일으킬 수 있어
하느님의 생명의 질서와 구조를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토착화이건, 이천년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문화와 전례 등을 한국적으로 구현하는 토착화이건, 모든 토착화 과정은 갈등과 긴장을 촉발시킬 수 있다.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였는데, 이 불과 칼은 교회 안에서도 첨예하게 작용해온 것이다(루가 12, 49와 마태 10, 34).
이런 현실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거부하는 장상에게 돌아가서 다시 그의 앞에 섰다. 이것은 그가 가난의 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교에게 다시 거절당하더라도, 그것이 상처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도리를 다시 한 번 실천할 은총의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저 가난한 마음. 다시 거부당하면, 또 다시 순명의 영으로 물러날 용기. 이것이 없다면, 그는 결코 아버지 주교를 찾아가서 그의 앞에 다시 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의 토착화란 지식으로, 테크닉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가난한 영으로, 겸손과 순명과 사랑으로, 거부당하는 것을 끝까지 감내할 용기로 하는 것이라고. 토착화는 본래 영의 일인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하느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바라시는 이 믿음의 덕들을 어떻게 성숙시켜 갈까?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그리움과 충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갈 용기와 겸손, 이 덕들을 어떻게 역동적으로 토착화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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