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참 제자 될 수 없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경고(8, 14~21)
이제 두 가지 빵의 기적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시는 단계에 이른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상징적이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다고 한다(14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뜬금없이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분부하신다(15절). 그러자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리고(16절),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고 제자들을 심하게 꾸짖으신다(17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일까? 빵이 한 개밖에 없다는 사실과 바리사이들의 누룩(헤로데의 누룩은 마르코의 가필)과는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질책은 유다 민족에게 내려졌던 예레미야의 날카로운 비판을 상기시킨다.
“어리석고 지각없는 백성아 제발 이 말을 들어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구나.”(예레 5, 21).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17b절)는 질문은 앞서 첫 번째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제자들의 완고함을 꾸짖었던 말씀이시다(6, 52).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 그분의 권능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인과 이방인을 위해 각각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셨던 기적 사건을 상기시키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유다인과 이방인을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의 빵이라는 말인가? 바리사이와 헤로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악한 누룩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성경은 계속하여 그 의미를 감추고 있지만 성경을 읽는 독자는 마르코 복음 1, 1~8, 21 전체를 마무리하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14장 22절에 가서야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곧 예수님 자신이 빵이라고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제2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8, 27~10, 45)
복음서의 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약상이 그려졌다.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하느님의 통치를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힘차게 선포하셨다.
그러나 이제 반대의 표적이 되어 수난 받고 돌아가실 예루살렘 여행길에 오르시게 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8, 27~10, 45)의 앞뒤로 소경을 치유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을 알아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벳사이다의 소경 치유=8, 22~26/ 예리고의 소경 치유=10, 46~52).
벳사이다의 소경을 점진적으로 치유하심(8, 22~26)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몰이해에 꾸중하시는 이야기(14~21절)와 그들의 첫 번째 신앙고백(27~30절) 사이에 자리잡은 이 이야기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1, 14~8,21)과 예루살렘으로의 여정(8, 27~10, 52)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런데 벳사이다의 소경 치유는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치유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치유하시는 점이 특이하다.
예수께서는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신다. 앞서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7, 31~37)와 비슷한 점이 많다[침을 뱉고 만지는 제의적인 행위, 함구령, 이사 35, 5~6a 인용 등]. 처음에는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이던 것이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볼 수 있게 된다(25절).
치유사화는 보통 치유 받은 이의 선언이나 목격자들의 반응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집으로 보내시면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제자들에 대한 함구령과 같은 것이다.
마르코가 예루살렘 여정을 서술하면서 점진적으로 시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제자들의 영적 진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을 수난 받고 고통 당하는 메시아로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기까지 그분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십자가의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없다.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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