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의 영’은 토착화 원동력
지난 호에서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가로막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경우에 처하여 프란치스코는 깊은 겸손으로 순명하면서도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할 그의 자유와 사명을 충실하게 지켜가고자 하였다. 이처럼 순명할 줄 아는 영은 거부당하는 것을 받아안을 가난한 마음과 용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때 알디제리 주교는 프란치스코의 이 겸손을 “거룩한” 것으로 일컬으며 그와 그의 작은 형제들에게 설교할 권한을 허락하였다. 우리는 이 일화에서 입으로 하는 말이 마음과 영과 온 존재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말’은 온 존재를 드러내는 것
이번에는 하느님의 다스림에 비추어 부당한 것을 요구받을 때, 이를 어떻게 하느님의 질서에 부합하게 돌려놓을 것인가에 관한 사랑의 비판 방법을 “말”의 존재 차원에 주목하며 살펴보기로 한다.
어느날 “효”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공자는 “무위(無違),” 곧 “어그러뜨리지 않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리고는 “살아 계실 때 예로 섬기고 장사지낼 때 예로 모시며 예로 제사 지내는 것”이라고 풀어 설명하였다(논어, 위정편, 5).
이 대목을 놓고 후대의 한 주석가는 효도를 하는 사람은 매사에 순종하여 거스르지 않는다고 하였고, 어떤 이는 어버이의 명을 어기지 않고 따른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이런 입장에 대해서 한 마디로 답한다. “아니다”라고. 왜인가? 그 이유를 이렇게 진술한다: “부모를 섬기는 도리에는 은근스레 간언하는 의의가 있는데 어떻게 매사를 모두 순종하여 어기지 말라는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국역 여유당전서 경집 2: 논어고금주, 48)
정약용이 볼 때, “무위”란 단순히 부모의 명을 어기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는 효를 일방적 순종으로 보는 한계를 직시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진정한 효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을 정약용의 “기간” 비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직간 않고 은근한 뜻으로…”
그에 의하면, “기간(幾諫)이란 과감히 직간하지 않고 은근한 뜻으로 풍자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 이는 어버이의 명을 따를 수 없다는 자신의 뜻을 은근히 보여주고 또한 공경한 마음으로 어버이의 명을 어기지 않고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처럼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나 아무리 괴롭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논어, 이인편, 18 참조).
정약용은 이러한 입장을 좀더 설명하면서 이렇게 “기간”을 예찬한다: “부모가 한 번 간함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드디어 어버이의 명을 순종한다면 이는 어버이를 악으로 빠뜨리게 되는 것이니 간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 한편으로 따르지 않고 한편으로 어기지 않음은 지극히 괴로운 것이며 지극히 원만한 일이다. 이처럼 하는 데에도 깨우치지 못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거룩하다. 기간의 방법이여.”
정약용의 부모사랑 방법
정약용은 부모를 사랑하는 법과 순명하는 정도(正道)를 말하면서 이것을 “거룩하다”고 일컫는다. 그러나 정약용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 이 방법을 실천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할 수 있는가를. 정약용은 말한다. “만일 부모께서 성을 내어 매를 때려 피가 흐르더라도 감히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일어나 공경하고 일어나 효도해야 한다”(경집 2, 162-3).
정약용은 왕과 집안이 가로막은 서학을 하면서 그를 아끼던 정조와 채제공을 비롯하여 여러 선배와 동료들, 그리고 부친 정재원과 집안 어른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 전력을 갖고 있다. 서학에 대한 깊은 사랑과 효와 충의 정도를 놓고 그야말로 “기간”하며 신음했던 그였고, 그 신앙의 경력 때문에 심문대에 묶여야 했던 그였다. 이 인물이 “기간”을 거룩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인물이 부모에게 피 흐르도록 맞아 쓰러지더라도 원망하거나 미워함이 없이 떨치고 일어나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를 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기간의 영”이 이땅의 신앙 공동체가 특히 세계 교회와 교도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가슴에 품은 것을 “입으로” 전하고 온몸으로 구현하는 토착화의 원동력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포인트를 포착할 수 있는데, 다음호에서는 이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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