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통해 ‘인간자유’ 탐구
힘든 시대상과 경험을 바탕으로
죄와 벌’‘카라마조프가의’등 남겨
젊은 사형수가 있었다. 사형 집행날, 형장에 도착한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28세의 젊은 나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5분은 짧지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사형수는 이 5분 중에서 자신을 아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데 2분,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2분, 그리고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신이 딛고 선 이 땅에 감사하는데 마지막 1분을 쓰기로 했다.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금쪽 같은 시간을 소중하게 쓰지 못한 것에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 명령이 전해졌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 불후의 명작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문호로 성장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죽음 직전에 목숨을 구했다.
평생을 간질로 육체와 정신이 공격받았고, 사형집행 직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짐으로써 느낀 죽음의 심연, 그리고 지옥과도 같았던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살이, 물질적으로 궁핍했던 삶 등 도스토예프스키가 겪었던 개인적인 고통과 수난은 어쩌면 시대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인 제 관계가 새로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였다. 그러한 시대적 고민은 그의 삶 안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따라서 자신의 작품 안에서도 전적으로 드러나 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 Fyodor Mikhailovich, 1821~1881)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이미 복음서와 카람진이 쓴 러시아 역사서를 읽었다. 매우 조숙하고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항상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학교 때부터 많은 문학작품들을 섭렵했다.
다양한 인간열정 탐구
1837년 어머니와 자신이 존경하던 시인 푸시킨이 사망함에 따라 그는 깊은 영혼의 상처를 받았다. 그 후 페테르스부르크 공병학교에 입학했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던 그는 1843년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페테르스부르크 공병단 제도국에 배치됐으나 1844년 작가가 되기로 결심, 육군 중위로 제대했다.
그해 프랑스 작가 발작의 <예브게니 그랑제>를 번역, 호평을 받은데 힘을 얻은 그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이듬해에 발표하고 <분신>, <여주인>, <백야>를 잇따라 저술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의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비극과 그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려낸 것으로 이로써 당대의 비평계에서 큰 호평을 받는다. <분신>과 <여주인> 등에서는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며 <백야>에서는 인간 열정의 여러 측면들이 탐구되고,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페트라셉스키의 사회주의 서클에로 접근해간다. 한편 이때부터 그의 간질 발작 증세가 시작돼 평생동안 그의 육체와 영혼을 괴롭혔다.
1847년부터 사회주의 서클에 참여하던 그는 농노제 폐지, 검열제도의 철폐, 그리고 재판제도의 개혁 등을 요구하는 토론에 가담했고, 1849년 서클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총살 직전 호아제의 특사로 징역형으로 감형,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살이를 떠난다.
1859년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왕성한 문학활동을 펼친다. 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를 펴내고 유형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죽음의 집의 기록> 등을 발표했다. 이러한 작품들로 문단으로의 복귀를 다진 그는 이후 수년 동안 개인적으로 큰 고통을 받는다. 형이 남긴 부채를 피해 외국으로 떠난 4년 동안 그는 <죄와 벌>, <백치>, <악령> 등의 대표작들을 이 시기에 저술했다.
종교적 관심 일깨워
외유에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노년의 10여년 동안은 <미성년>, <작가의 일기>외에 불후의 걸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성한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의 종교관을 여지없이 드러낸 걸작으로 <죄와 벌>에서 이미 제기했던 인간 자유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러시아는 물론 세계의 여러 사상가들과 문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 명성은 20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20세기초 러시아 지성인들 사이에 종교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그는 모스크바의 푸시킨 동상 제막식에서 기념강연을 함으로써 그 명성에 절정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반년 남짓 후 그는 간질, 폐기종, 폐결핵 등의 병이 악화돼 1881년 1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은 예외없이 인간 내부의 긍정과 부정적인 요소들, 존재 자체의 내적 모순성을 다룬다. 고통과 번민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발견한 이러한 모순성은 그의 작품 안에서 본능과 이성, 때로는 신성과 악마성의 모순 등으로 드러난다.
신의 존재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시대가 드러내는 그리스도교와 그 문화의 위기와 도전을 심오하게 다루면서, 서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가 신에 대한 인간의 배반이 빚어내는 것으로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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