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하고 인내하며 순명해야
지난 호에 정약용이 ‘기간’(幾諫)의 도리를 어떻게 보았는지 설명하면서 세 가지 통찰을 읽어 낼 수 있다고 하였다. 첫째, 비판을 하되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어버이의 명을 따를 수 없다는 자신의 뜻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표현하며 어버이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이 괴로운 일일지라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비판하지만 온유함 지녀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온유’의 덕과 닮았다.
‘기간’의 영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은 부모나 윗사람은 물론 동료와 아랫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들을 진리로 이끄는 데 온유하다.
이것은 비판하면서도 자신에게 비판받는 사람의 인격을 끝까지 존중할 줄 아는 영성의 깊이와 관련되어 있다. 실로 비판받는 사람까지 존중할 줄 모른다면, 그런 비판은 이미 낮은 단계의 비판 상태를 면키 어렵다.
사랑에서 우러나서 사랑을 설득하려면, ‘사랑의 방법’을 지켜 가는 충실과 성실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것은 사랑이 부족하거나 사랑을 충실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때로는, 비판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온유를 지켜 가지 않을 때, 서로 간직했던 사랑마저 파괴당할 수조차 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간하는 것이라면, 사랑에 부합하게 전하고 기다리며 구원 체험의 길을 열 수 있어야 하는데, 저 온유의 영으로 함부로 말하지 않을 용기와 인내야말로 이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둘째, 자신의 뜻이 참으로 옳을 때, 그것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부모가 한 번 간함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명에 순종한다면 이는 어버이를 악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한편으로 따르지 않고 한편으로 어기지 않음은 지극히 괴로운 것”이어도, 자신의 옳음을 지켜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효를 다하는 것은, 마치 천국에 이르는 문이 좁듯이(마태 7, 13∼14), 그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간함을 지켜 가는 것은 창조 때에 하느님께 부여받은 자유와 주체성을 어떤 억압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음을 말한다. 하느님이 모든 존재의 자유와 주체성의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그 누구의 권위 행사도 하느님의 진리의 틀에 의하여 검증받지 않고서는 그 자체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토착화 주체들은,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안티오키아 교회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이러한 근원적 자유를 원천으로 하여 토착화의 비전을 성숙한 방법에 따라 전달할 권리와 책임을 갖는다.
셋째, 순명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설령 간하는 것에 대해서 “부모께서 성을 내어 매를 때려 피가 흐르더라도 감히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일어나 공경하고 일어나 효도해야 한다”고 했다. 맞아서 피를 흘리더라도 사랑으로 자녀의 도리를 다하는 이것이 진리를 향한 자기의 자유를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오직 이 사랑으로만이, 아닌 길을 따라 걷지 않으면서도 존중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부모에 대한 자기의 진정한 효심을 이루어 갈 수 있게 할 것이다.
하느님 섭리 따르는 순명
이러한 순명의 영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비롯되는 인내에 근거해 있다. 이런 면에서 나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브 콩가르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주목한다.
“인내란 단순히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정신의,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는 마음의 역량이다. 그것은 첫째로 하느님이 책임을 지고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은혜로운 계획을 성취하신다는 것과 둘째로 모든 커다란 일들에서 지연은 성숙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심오하고도 실존적인 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충실한 이견자〉, 다른우리, 2003, 206)
정약용의 실학이나 콩가르의 신학의 깊이는 천심(天心)에 뿌리 내린 이런 인내와 순명의 영에서 비롯되었던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신학을 하며 겪을 수 있는 고난을 가장 하느님의 자녀답게, 가장 예수님의 제자답게 극복해 갈 원천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황종렬 (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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