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방황하는 인간 묘사
부르조아의 숨막히는 인간관계 탐구
하느님 은총의 힘, 작품 속에 암시
“인생은 의미있는 것이다. 행선지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단 하나의 괴로움도 헛되지 않으며, 한 방울의 눈물, 한 방울의 피도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를 거치며 현대인과 그 삶의 추악한 현실을 인간 구원의 관점에서 조명한 가톨릭 작가 중의 한 사람,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수필가, 시인이며 극작가, 언론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모리아크의 묘비에 새겨진 말이다.
그는 비록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인간의 타락과 죄악을 반복해서 묘사하면서, 인간이 죄에 이끌리는 사악한 본능을 지닌 존재임을 설파했지만, 그러한 인간의 죄와 욕망은 마침내 하느님의 은총으로 극복됨으로써 구원을 향해 나아감을 알려주려고 했다.
평론가들은 그가 비록 가톨릭 작가이긴 하지만 가톨릭 교리를 직접적으로 작품에 반영하고 역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타락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은총의 힘을 발견하도록 이끈다고 말한다.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인생의 괴로움과 눈물, 피 한방울 조차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느님 구원 가능성 그려
프랑수아 모리아크(Mauriac, Frqncois 1885~1970)는 1885년 10월 11일 프랑스 보르도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유복한 부르조아로 덕분에 그는 평생 동안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부친은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를 즐겨 낭송했던 문학 청년으로 자유사상가이자 무신론자였으나, 어머니는 두터운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 그리고 마리아회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그는 깊은 신앙과 예민한 감성을 키워나갔다.
1906년 보르도 대학을 졸업하고 파리에서 1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친 뒤 1908년 고문서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그 이듬해 문학에 정진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첫 시집 ‘맞잡은 손’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등단했으나 그는 이 한 권으로 시에서 소설로 장르를 전환한다.
1913년 ‘사슬에 묶인 아이’에 이어 1914년 ‘백의’를 발표했는데, 이런 초기작품에서 그는 고향인 보르도에서 살아가는 부르조아 생활의 단조롭고 숨막히는 구속을 바탕으로 사랑을 빼앗긴 사람들간의 관계를 탐구했으며, 이는 그후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됐다.
체제 거부한 ‘자유인’
1920년대는 그의 문학적 기량이 더욱 원숙해지는데, 1922년 ‘문둥이에게 보내는 입맞춤’, 이어 ‘불의 강’, ‘사랑의 사막’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고 1927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테레즈 데케루’를 발표한다. ‘사랑의 사막’은 그해 프랑스 학술원에서 수여하는 소설 부문 대상을 받았다.
‘테레즈 데케루’는 가정과 사회의 속박으로 고립되어 있는 테레즈라는 한 여인이 남편의 독살을 꾀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녀의 살인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 진정한 자유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이 작품과 함께 모리아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독사 떼의 얽힘’(1932)은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가족에 대한 늙은 법률가의 증오심과 탐욕, 개종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모리아크는 인간 사이의 사랑은 헛된 것이며, 인간의 모든 악과 욕정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구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리고 있다.
30년대의 모리아크는 문학가로서 원숙한 단계를 맞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평론가, 언론인으로서도 그 명성을 떨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특히 그는 문학가로서 뿐만 아니라 빼어난 논쟁가이기도 했는데, 30년대에는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를 비난하고 파시즘을 규탄하면서 논쟁에 뛰어들었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레지스탕스 작가들과 함께 일했고 전후에는 정치 토론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95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1962년부터 드골을 지지해 같은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1970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체제와 제도에 속하기를 거부한 진정한 자유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20세기 대표적인 가톨릭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그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신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주제로 한다. 인간 자체가 원래 내면의 원죄 의식 때문에 갈등을 겪으며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에만 결국 신의 은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가톨릭 작가들처럼 자신의 신앙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유혹과 죄악으로 방황하는 인간들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모습들을 작품에 담는다. 바로 그러한 극도의 타락과 삶의 극단까지 나아감으로써 그들 스스로 신의 존재와 구원의 빛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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