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사고가 긍정의 영 불러
지금까지 토착화 유형 가운데 신학의 ‘소통’ 차원을 역동적으로 드러내 줄 ‘입으로’하는 토착화를 살펴보았다. 토착화 과정에서 입을 함부로 열면 토착화가 섣부르게 나타나고, 거칠게 열면 투박하고 부담스러워진다.
피상적으로 겉돌면 천박하거나 진부해지기 쉽다. 깊고 따뜻하게 열면 토착화가 심오해지고 밝아진다. 존재를 걸어 입을 열면 그 토착화는 그만큼 더 믿을 수 있고, 교회와 민중에게 생명의 질을 역동적으로 매개하는 길이 되어 주리라.
‘입’을 열어서 소통시키는 경우와 ‘입’을 닫아서, 곧 ‘묵언’으로 소통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 두 유형 모두 하느님의 삼위가 이루시는 ‘소통’에 닿아 있고, 또 그럴 수 있을 때 모든 ‘진술’과 ‘묵언’의 존재 이유를 온전히 구현하게 된다. ‘묵언’의 토착화 유형은 특히 ‘온몸으로’하는 토착화와 긴밀하게 상통되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 가서 다시 돌아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신학은 ‘이성’의 작용
‘입으로’하는 토착화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이번에는 ‘머리로’하는 토착화 유형을 보고자 한다. 신학은 ‘이성’의 작용을 기본 방법으로 갖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을 하느님이 직접 부여하신 ‘영혼’의 한 역할로 보는데, 이는 우리의 성찰이 하느님의 뜻에 닿아 있어야 할 과제의 깊이를 드러내 준다. 또한 모든 신학과 영성과 사목의 실천은 성찰을 전제로 하고, 성찰은 실천을 지향한다. 이런 면에서 머리로 하는 토착화 유형이 갖는 의의는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1997년에 미국으로 가서 학위 과정을 밟으면서도 한국 신학계를 끊임없이 살펴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새롭게 자각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가 특히 1984년 200주년을 발판으로 삼아 시작한 토착화 논의가 갖는 한국 신학사적 의의였다.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도 1987년부터 근 20년 동안 한국사목연구소를 중심으로 신학과 종교, 사상 등과 관련한 분야에서 토착화를 개진하면서 다양한 성찰 결과를 도출하였다. 미국으로 갈 당시 이 연구소는 전례와 영성, 교리교육, 신관 등의 분야를 다루었다. 여기서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사상들과 그리스도 신앙 전통을 연결지어 성찰하면서 대화 가능성이나 우리말로 표현할 가능성 등을 모색하는 사고 중심의 토착화 논의 단계를 잘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나는 〈사목〉지에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펼쳐온 토착화 연구를 모델별로 제시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한국 토착화 신학의 구조〉를 출간하였다. 이 연구의 핵심 자료 가운데 일부가 위의 토착화 연구 기획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학 전에도 이런 성과의 의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토착화를 위한 여러 나라의 노력을 비교해 보면서, 우리처럼 전국 주교회의 차원에서 토착화 비전을 구축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교회가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교회, 토착화 관심 높아
또한 교회사 분야에서 한국 교회가 그동안 성찰해온 성과가, 이것을 토착화 신학의 관점에서 주목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현실 속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확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막 싹트고 있던 평신도들의 토착화 운동이나 씨튼 연구원의 종교 대화 프로그램 등도 사고의 틀을 쇄신하는 차원과 연계하여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어떤 한 틀 안에서는 틀의 전모를 보기가 원래 불가능한 법이다. 한계도 그렇지만, 바람직한 면도 그럴 수 있다. 한국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한국 가톨릭 신학계를 보면서, 그 나름의 역동성과 노력의 자취들을 좀더 선명하게 인식하고, 이런 노력 과정을 소중하게 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으로 유학가면서 명시적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매우 귀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였다.
토착화를 보다 더 역동적이고 심도 있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현주소를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을 영성의 깊이가 필요하다. 토착화란 언제나, 설령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현존재 상태에서 그 단계에 부합한 형태로 성령의 이끄심에 내어맡기는 위탁의 영으로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긍정의 사고가 긍정의 영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이 긍정의 사고와 영이 없이는 아름다운 토착화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황종렬 (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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