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노동 가난 겸손의 영성
성모영보수녀회 통해 이어져
하느님 말씀대로 산 참 사목자
선종직전까지 성경번역에 헌신
유품은 원주교구 용소막성당에
“이 목메임은… 신부님께서 살다 가신 60평생이 서러워서도 아니며, 이 목메임은… 우리를 두고 먼저 길 떠나신 신부님이 야속해서도 아니요, 이 목메임은… 님 제대로 배웅하지 못하여 쳐오르는, 저희들의 완성되지 못한 사랑 때문입니다.”<성모영보수녀회 막내딸 수련자 요셉 올림>
‘하느님이 한국말을 하는데 쓰인 도구’ 고(故) 선종완 신부의 선종 30주기를 기억하는 미사가 7월11일 경기도 과천 문원동 성모영보수녀회 성당에서 수원교구 이정운 몬시뇰 주례로 봉헌됐다. 공동번역 구약성서를 번역한 성서학자, 선 신부는 철저히 성서대로 생각하며 성서대로 실천하고 성서의 삶을 살은 ‘말씀으로 산 사제’. 특히 말씀을 기반으로한 선신부의 기도·노동·가난·겸손의 영성은 자신이 설립(1960년)한 성모영보수녀회를 통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915년 강원도 원주군 신림면 용암리에서 선치태(라파엘) 옹과 정치영(카타리나) 여사 사이에 외아들로 출생한 선신부는 16세가 되던 1930년 신학교에 입학, 1942년 춘천교구 사제로 품을 받았다. 당시 28세. 수품 1개월 후 일본으로 유학한 선신부는 일본 중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1948년에는 로마로 유학, 울바노 대학과 로마 성서대학, 예루살렘 성서연구원 등에서 성서와 고고학 등을 수학했다.
1952년 한국으로 돌아온 선 신부는 그해 가톨릭대 교수로 임명됐으며, 1955년 구약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이후 1960년에는 경기도 부천 신천리에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한 선신부는 1968년 성서공동번역 가톨릭측 전문위원으로 피명된 후 성서 번역에 매진했다.
극심한 과로로 간암 판정을 받은 선신부는 구약성서 마지막 번역 원고를 성서공의회로 전달한 다음 날인 1976년 7월11일 선종했다. 향년 62세.
선신부는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임종의 고통’을 한민족의 복음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봉헌했으며, “말씀을 단순히 지식이 아닌 삶으로 살아갈 것”과 “겸손과 가난의 삶을 살아줄 것”을 당부하는 유언을 남겼다. 선신부의 유해는 현재 과천 성모영보수녀원 뒷산에 안장돼 있으며, 관련 유품 등은 원주교구 용소막성당 유물관에 전시돼 있다.
신현만 정인준 신부 등 원주교구 관계자와 성모영보수녀회 회원 등 200여명이 함께한 이날 미사에서 이정운 몬시뇰은 “말씀의 종, 선종완 신부님은 평생동안 겸손과 가난을 실천하신 분”이라며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선 신부님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인숙 성모영보수녀회 총원장은 “말씀과 가난, 겸손, 노동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 드리고 선신부님께 기쁨 드릴 수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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