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신부님 복사 아이들이 주수병(포도주와 물을 담는 병)을 깨뜨렸어요."
"신부님, 오늘 복사 아이가 오지 않았습니다."
미사를 앞두고 제의방에서 간간이 듣게 되는 말이다. 주수병이 깨져서 다른 것으로 대신할 때도 있고, 복사 아이가 오지 않아서 혼자 미사를 봉헌할 때도 있다. 가끔씩은 저희들끼리 싸워서 얼굴이 붉어진 채로 미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그 아이들이 정말 사랑스럽다.
언 손 모아 뜨거운 기도를
날씨가 추운 날이면 나조차도 새벽미사 드리는 발걸음이 무거운데, 제의방에는 어김없이 복사 아이들이 새벽바람에 빨갛게 언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새벽길을 급하게 뛰어오느라 머리는 가지런하지 않아도, 또 약간은 졸린 기색을 보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때의 반가움과 고마움이 얼마나 큰지! 아이들의 부모들도 신기한 듯 “학교가라고 깨우면 늦장을 부리는 아이가 미사 복사 때에는 어쩌면 그렇게 군소리 없이 일어나는지요”하고 이야기 한다. 참 기특한 아이들이다.
때때로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고 딴청을 부리는 때가 있다. 아직 전례에 익숙치 않아서 엉뚱하게 행동할 때도 있다. 나는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누른다. 조금 눈치가 있는 아이는 미사가 끝난 후 제의방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전한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면 그것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좋아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지 못하는 편이다. 아이들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기 때문이다. 그 나이에 얼마나 더 자고 싶겠는가. 그 나이에 얼마나 친구들과 놀고 싶겠는가. 그럼에도 새벽에 일어나고,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제의방으로 뛰어 들어온다. 저 아이들이 있어 나의 미사가 풍성해지고, 보다 더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다.
넉넉한 마음 닮고싶어
복사 아이들을 대할 때 나는 오래 전에 어떤 신부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생각한다. 언젠가 어떤 신부님께서 미사를 봉헌하시는데 복사 아이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시작부터 졸고 있었다고 한다. 서있을 때도 졸고, 무릎을 꿇고도 조는 터라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신부님께서 그냥 모른 체 하셨단다. 복사 아이가 종을 쳐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종소리가 나지 않아 바라보니까 여전히 복사 아이는 졸고 있었단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신부님께서 입으로 대신 종소리를 내셨다고 한다. 그 신부님의 넉넉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다. 나도 그 신부님처럼 넉넉한 마음을 닮고 싶었다. 그래서 복사 아이들이 아무리 딴청을 피워도 그냥 가만히 있어준다.
노력하는 모습 기특해
요새 우리 본당에서는 새로운 복사 아이들을 선발하기 위해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중이다. 그래서 열 살 안팎의 아이들 십여 명이 매일 미사에 나온다. 어떤 아이들은 조느라 몸이 기우뚱하기도 하지만, 작은 손을 모으고 열심히 졸음을 깨우면서 미사를 봉헌하는 나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복사가 되겠다고 저 고생을 하는가 싶어 그 모습이 안쓰럽다. 미사 시간에 신부님을 도와 주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생각하고, 힘들어도 참아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어떤 영화배우가 큰 상을 받은 후 소감에서 ‘자신은 많은 사람들이 차려 놓은 밥상에서 숟가락을 들고 먹기만 했다’고 말했다. 내가 봉헌하는 미사도 이와 같을 것이다. 사제인 내가 미사를 봉헌하지만, 이 미사는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사랑으로 준비되어 있다. 나보다 이른 시각에 나와 제대도 차리고, 제의도 펴고, 그리고 복사 아이들도 대기하고 있다. 나는 잘 차려진 위에서 그냥 미사를 드리는 것뿐이다. 이 모든 이들의 수고와 정성위에서. 그래서 감사하다.
추교윤 신부(의정부교구 덕정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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