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계획을 밝히는 능력
머리로 하는 토착화와 관련하여 앞에서 살펴본 기관 외에도 언급할 단체들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정의구현 사제단의 정의를 위한 투신과 성찰, 그리고 이 과정을 뒷받침했던 바티칸 공의회 비전의 한국적 적용이 갖는 한국신학적 의의는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1990년대에 발족한 평신도 신학 연구 단체인 우리신학 연구소와 평신도 신학과 영성의 나눔의 장을 열어온 신앙인 아카데미 등도 한국적 신학의 정도(正道)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머리로 대변되는 ‘이성’
개인 차원에서 대표적인 학자로는 심상태 몬시뇰과 이제민, 김웅태, 곽승룡 신부와 박일영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심몬시뇰의 신학 비전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이제민 신부의 한국 신학 비전과 그에 따른 신학적 고난에 관해서는 이미 검토한 바 있다(〈한국토착화신학의 구조〉 7장과 사제단 주보 〈빛두레〉 2002년 첫 주부터 2003년 부활주일까지 ‘열린교회로 가는 길’에 실린 글들 참조).
이들 외에도 정양모, 함세웅 신부와 김승혜 수녀, 그리고 서구와 중남미 지역 등에서 신학자로 주목받은 김지하의 작품을 비롯하여, 특히 오늘의 생태신학의 관점에서, 장일순과 정호경 신부 등의 토착화 비전도 주목된다. 이들의 신학 비전을 정리하여 나눌 수 있을 때, 한국 신학계는 현대 세계 가톨릭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기여할 길이 그렇게 먼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절감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머리로 하는 토착화를 성찰할 때, 핵심은 하느님의 계획을 식별하는 능력에 놓여 있다. ‘입으로 하는 토착화’를 언급하면서, 인간의 전존재 차원에서 입이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의 소통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마찬가지로, 머리로 대변되는 ‘이성’ 역시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의 계획을 인식하고 나누는 원천으로서, 인간의 전존재를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과 대면시킨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살리는 통치에 비추어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생동하게 하며 미래를 기획함으로써 창조된 존재의 축복과 온 창조계와 더불어 사는 기쁨을 향유할 길을 열어 간다.
실로, 이성은 하느님의 영을 따라서 하느님의 생명의 길을 밝게 비추는 무엇이다. 하느님이 품으신 생명의 계획을 밝히는 일, 바로 여기에 이성의 존재 이유가 있는데, 이성이란 모든 것을 밝게 아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밝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16, 17세기 선교사들이 차이나에 와서 그리스도교 신인(神人)관을 전하면서 ‘영명(靈明)’을 이야기한 것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하느님 영의 토착화
‘영’ 개념과 동아시아 사상의 한 요체인 ‘명’ 개념은 마테오 리치(M. Ricci, 1552∼1610)나 판토하(D. Pantoja, 1571∼1618), 그리고 다른 여러 차이나 선교사에게 중요한 용어로 나타난다.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영(靈)과 인간의 영이 모두 밝은 존재이자 밝히는 실체로서, 하느님이 하느님이시고 인간이 인간인 근본 이유를 구성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 두 개념을 결합하여 ‘영명(靈明)’이라는 말을 형성하고, 이것을 하느님과 인간을 설명하는 한 핵심어로 삼기에 이른다.(판토하, 〈칠극〉과 샤바냑, 〈진도자증(眞道自證)〉 등 참조)
이것은 후에 정약용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상제-천과 인간의 근본 속성을 ‘영명’에서 보게 만드는 한 사상적 전거를 이룬다(이에 관해서는 〈기독교사상〉 2006년 7월호부터 연재 중인 ‘정약용의 영명 존재관’ 참조).
이를테면, 다산의 사유에서, 하느님이 영(靈)하시다는 것은 밝히 아신다는 것을 뜻하고, 인간이 하느님께 영명을 직접 부여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명’을 닮아서 밝게 알아 생명의 도리를 지켜 갈 능력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그리스도교의 imago Dei: 천주의 모상→다산의 초천〈肖天〉). 정약용이 그리스도교에서 ‘영혼’이라고 일컫는 것을, 박해라는 어두운 조건 하에서, ‘영명’으로 돌려 표현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면, 머리로, 영혼의 이성으로,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언어로 말하자면, ‘영명’으로 토착화를 밝혀갈 때, 하느님의 영의 토착화, 하느님의 생명의 토착화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