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어머니 영향으로 모범적인 학창시절 보내
일보다 가족이 우선
어린시절, 나는 매우 착실한 학생이었다. 리더십도 무척이나 강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 내내 학급 반장을 도맡아했었다. 부지런한 편이었고, 주변을 잘 챙기는 아이였었다. 늘 먼저 알아서 생활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고 할까.
공부는 진짜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 시절, 나의 성실한 모습을 보고 굳이 ‘모범생’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땐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즈음은 분위기가 좀 달라서 그런 모습을 모범생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의 학창시절에서는 학생들이 해야할 당연한 일과로 받아들였다.
반장을 도맡아한 것도, 한번 반장을 한 이후 친구들의 머릿속에는 늘 내가 반장으로 기억됐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그래서 학년이 올라가도 자연스럽게 반장으로 선출됐던 것 같다.
사실 ‘학창시절을 참 재미없게 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 나와 참 잘 맞는 생활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렇게 성실한 학창시절을 보낸 중심에는 우리 어머니가 계셨다. 정말 모든 것이 ‘어머니’의 공이다.
우리 어머니는 참 엄한 분이셨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완고하셨다.
어머니는 한결같이 이른 아침 일어나셔서 따뜻한 밥과 국을 차리셨다. 생선을 굽는 등 손이 많이 가는 일도 꼭꼭 챙기셨다. 점심밥도 항상 따뜻하게 새로 지어 내시는 분이셨다. 항상 자식들은 귀족이나 공주마마라도 되는 양 대우해주셨다. 자식들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빈틈없이 뒷바라지하는 그런 분이셨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성장한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내가 입고 먹고하는 것에 대해 단 한순간도 불편한 적이 없이 늘 풍요로웠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늘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챙겨주시는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주어진 일은 오로지 공부였다. 어머니를 거역할 핑계거리는 전혀 없었다. 어머니의 제재와 완고함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고 키워갔다. 아마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아가 강하고 승부욕도 강한 편이었다.
어머니도 그렇게 늘 가족을 우선으로 돌보셨고, 집안을 편안하게 하는데 힘쓰셨다. 사회의 가장 기본공동체인 가정이 평안하고 올바로 서야한다는 중요성을 깨우쳐주신 분이었다.
지금 내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직접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챙기는 것은 우리 어머니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내 가정에 대해 불편함없이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족도 나의 일부분이다. 개인시간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생도 감수해야하지만 가정을 챙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공부 잘하고, 학교에 잘 다니면 그때는 특별한 고민거리가 없었다. 또 연예인이 되겠다는 생각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은 무척이나 평안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뒤돌아볼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았었다. 적어도 대학입시에 실패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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