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청소년들을 위해 산 교육자
그리스도교 사랑에서 '예방교육법' 착안
살레시오 수도회 수녀회 협력자회 창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나의 마지막 숨까지 다 바치겠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청소년들을 하느님의 품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돈 보스코라고 불리운 요한 보스코(Bosco, Giovanni, 1815~1888) 성인이 아닐 수 없다.
교육의 지침 확립
그는 평생 동안 청소년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살았으며 청소년들 역시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평범함 속에서 비범하게 이뤄진 돈 보스코 성인의 이른바 '예방 교육'은 시대를 초월해 모든 교육자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교육의 지침이며 선물이었다.
그가 실천한 교육 방법과 사업들, 그리고 그가 창설한 기관들은 교육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는 가톨릭 교육의 전통 안에서 애덕,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을 독특한 형태로 강조했다.
'예방 교육법'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교육 방법은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1코린 13, 4~7)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초자연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예방 교육'이란 청소년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질과 역량을 모든 차원에서 일깨워 적극 장려함으로써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장해 진실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이 '삶의 주역'이 되어 '삶을 축제'로 살아가는 행복한 인간을 양성해내는 것이 이 교육의 여정이다.
그는 이르기를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처럼 그가 말하는 예방 교육법의 근본적인 원리는 바로 '감응하는 사랑'이다. 이러한 교육은 젊은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내부로부터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꿈 통해 사제성소 받아
성인이며, 살레시오 수도회와 살레시오 수녀회를 설립한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사르데냐 왕국 피에몬테의 베키(Becchi)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망해 어머니로부터 깊은 신앙과 확고한 의지를 이어받았으며, 특히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자녀들의 종교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성인은 훗날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보스코의 일생에서 삶의 근본적 결단을 내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9세 때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던 그는 어느날 꿈을 꾸는데, 이 꿈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통한 소명의식을 느끼게 된다. 1858년 살레시오회를 창립하기 위해서 교황 비오 9세를 알현했을 당시 그는 이 꿈을 통해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게 됐다고 말했다.
이 꿈을 통해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 그는 어려운 생활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기에 일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를 했고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천부적으로 명석했던 그는 신학교를 다 마치고 나서 1841년 마침내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다.
청소년 교화에 평생 봉헌
사제가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된 청소년들을 찾아나선 일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도시에는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인 청소년들이 많았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살면서 범죄에 빠지게 되고, 교도소는 항상 이런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보스코 신부는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청소년들, 본의 아니게 교도소에 수감된 청소년들, 전쟁 고아들, 공장에서 비인간화돼가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돌봤다. 청소년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보스코 신부는 1846년 토리노시의 서북쪽에 정착해 한편으로는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한편으로는 견습생들을 가르쳤다.
이 사업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는 많은 평신도들을 영입하고 동시에 교황 비오 9세의 권고에 따라 1859년 18명의 제자들에게 수도서원을 하도록 했고 수도서원으로 기초를 다진 성 프란치스코의 살레시오 수도회는 1869년 정식으로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으며, 1871년에는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살레시오 수녀회,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했다.
평생을 청소년들을 위해 살았던 그는 1888년 1월 31일,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던 회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72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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