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과 서’ 신앙진리 밝혀
지난번에 토착화 논의의 성숙을 위하여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인 전문가 육성이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전교회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도모될 때, 우리 교회는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머리로 하는 토착화’ 단계나 원론적 수준의 토착화 논의에 머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때 소위 ‘이성’이라는 것을 신학의 무덤으로 전도시키지 않을 때 보다 더 건강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선교의 사명
적극적인 관점에서 진술하자면, 이렇게 토착화를 주체적으로 감당할 인재들을 얻을 때, 오늘의 삶의 자리를 선도하는 시대정신을 식별하여 이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적 가치에 부합한 형태로 통합시키는 데 진일보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자기와 이웃, 민족과 아시아의 복음화라는 우리 교회의 대사명을 내다보면서.
이번에는 다시 ‘머리로 하는 토착화’의 바람직한 형태로서, 영혼의 이성으로, 달리 말하자면, ‘영명’(靈明)으로 수행하는 하느님의 영과 생명의 토착화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동아시아에서 ‘머리로 하는 토착화’의 선구를 이룬 존재들은 동아시아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서구에서 온 선교사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 마테오 리치이다.
리치 신부는 1552년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1578년에 선교사로서 인도에 도착하였다. 1580년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중국 선교에 불리어서 1582년 한여름에 마카오에 도착한다. 다음해 9월에 동료 미켈 루지에리 신부와 함께 중국 남부 자오칭에 도착한 이래 1610년에 귀천하기까지 이 새로운 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리치가 최초로 쓴 한문 저서는 1595년에 펴낸 〈교우론〉이라는 얇은 책이었다. 이것은 ‘친구’가 인간의 삶에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설한 작품이다. 선교사가 교리서가 아니라 ‘우정’에 관한 책을 먼저 저술하여 중국인들과 나누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그가 믿음의 선포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이룰 무엇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이같은 ‘동아시아인들에 대한 신뢰’와 대화 정신은, 특히 그의 위대한 작품 〈천주실의〉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의 선교의 독특성을 드러낸다.
〈천주실의〉는 리치가 1603년에 베이징에서 상하 두 권으로 출판하였다. 각권이 4편씩, 총 8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국의 선비와 서양 선비를 등장시켜서 둘이 대화하는 형태로 전개되어 간다. 이를테면, 리치는 동과 서의 영혼과 영혼이 만나서 인간 이성 작용의 꽃이라 할 대화를 나누게 하는 방식으로 신앙의 진리를 밝혀 간다.
문화와 문화가 만날 때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차동엽 신부와 필자는 지난 8월 첫 금요일부터 ‘천주실의 강학회’를 펼쳐 가고 있다. 서울, 인천, 경기 지역 등의 신자로서 여기에 참여하는 수강자가 90여 명에 달한다. 전문적인 성격을 띠는 강좌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수강자가 찾아와서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 신앙 공동체가 〈천주실의〉로 대변되는 동아시아 신앙 유산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땅의 믿음의 선조들이 스스로 천주의 진리를 만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의 길을 따라 걷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켜 주었으며, 목숨을 걸고 이 열망을 지켜 갈 의지를 불태워 준 위대한 원천 가운데 한 작품이 〈천주실의〉이다. 우리는 지금 이 작품이 출판된 지 4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읽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문화와 문화가 만나서 어떤 일을 발생시킬 수 있는가를 살펴보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중이다.
리치는 자신이 남긴 천주 신앙 입문서라 할 이 저서를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하고 인간의 존재 이유를 해명함으로써 천주 신앙이 군자의 하늘 닮기(肖子)에 필수불가결하게 요청된다는 것을 설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인간의 사고 능력에 대한 신뢰 위에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대화의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논의를 개진하는데, 이것이 갖는 신학적, 영성적, 사목적 의의가 자못 크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황종렬 (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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