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없는 신학은 제 역할 못해
사람의 입이 왜 존재하는지 물으면 무엇이라 답할까? 나는 말한다. 입의 존재 이유는 질문하는 데 있다고. 인간은 질문하고 답하는, 생각하는 존재다. 질문이 가로막히면, 한이 쌓인다. 신학과 영성과 사목에서도 마찬가지다. 질문 없는 신학이나 영성, 혹은 질문을 가로막는 제도나 교육은 더 이상 제구실을 못한다. 질문을 가로막는 것이 억압의 본질인데, 질문을 못하게 하는 신학, 그런 영성, 그런 교육은 이미 생명을 키울 능력을 갖지 않는다.
이성의 주관자는 영혼
인간의 질문과 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고인데, 리치는 이 이성 작용의 주관자를 영혼으로 보았다. 이것은 전통 그리스도교 인간관을 그대로 대변한다. 대화 구조 속에서 질문한다는 것은 답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답을 말한다는 것은 질문을 제기할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질문하는 자유는 질문받을 책임과 교직되어 있고, 답을 할 책임과 권한은 답을 들을 권리와 의무를 동반한다.
그러므로 리치의 선포 행위가 대화 구조를 갖는 것은 선포를 듣는 이들의 질문할 자유와 답할 권리를 수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토착화를 소통의 관점에서 풀이했었는데, 이 면에서 리치의 대화 틀은 오늘의 토착화 신학의 기본 구조와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리치의 〈천주실의〉에 대한 중국 선비들의 높은 평가는 리치의 적응과 대화 정신에 담긴 동아시아 문화와 그 주체들에 대한 존중과 연계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예컨대 풍응경은 천주실의 초판에 서문을 쓴 인물인데, 리치의 천인관을 윤리적 관점에서 수용하면서, 하늘의 도를 회복하게 하는데서 리치의 역할을 보고 그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는 서문 결구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못난 나는 이제 만년이 되었고 이 지역(중국)도 다 다니지 못했으니 식견은 하늘을 우물 만하게 보는 개구리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다.…명백히 통달한 이(리치)와 함께 참뜻을 찾고자 한다.”
풍응경은 리치의 가르침에 견주어 자기의 식견을 우물 안 개구리의 그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리치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아서, 리치의 천주-인간 이야기를 인심과 천심의 회통을 가능하게 할 참된 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풍응경이 리치를 이토록 존중하는 것은 당대 서구 국가들이 식민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면서 그리스도교 진리를 강요하는 식의 비인격적 선포를 극복하고 대화의 영을 구현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천주실의〉는 당대 중국 선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재판에 들어갔는데, 재판 서문을 쓴 사람은 1601년에 리치를 만난 이지조였다. 그는 리치의 천에 대한 인식이 중국의 천-인식과 천 중심의 생활 전통하고 상통한다는 점을 깨닫고, 동과 서의 주민들이 멀리 떨어져 살면서 다른 말과 글을 사용해도 그들 사이에서도 마음과 이치는 하나로 통한다는 점을 역설한다(心同理同).
동아시아 선비들이 동과 서가 서로 통하는 것을 발견하고 상호 소통하는 데 이르기까지 리치가 수행한 불멸의 역할이 있다. 위에서 시사한 대로, 리치의 대화 정신에 담긴 ‘동아시아인-너’의 이성 능력에 대한 존중이 이들의 영혼을 움직이게 하였던 것이다.
대화, 신실하게 묻고 답하는 것
천주실의는 바로 이런 존중에 근거하여 쓰여져서 조선 후기 사대부들에게 전해졌고, 이들이 서학에서 서교로 전환할 마음을 불러일으킨 가장 결정적인 촉매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이런 맥락에서 이벽과 이승훈, 권일신, 철신 형제, 정약용, 약전, 약종 형제 등이 서학을 만나서 천주신앙에 마음을 열 수 있었던 한 결정적 계기를 천주실의의 ‘대화 정신’이 제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천주실의는 묻고 답하는 인간 행위의 영성적, 사목적, 신학적 의미를 작품으로 형상화한 한 대표적인 예이다. 대화란 단순히 각자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화란 신실하게 묻고 답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이중의 모놀로그, 이중의 독백이 되고 만다. 대화란 물을 자유와 답할 책임, 말할 자유와 들을 책임을 상호 존중의 영으로 구현해 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주실의의 대화 구조를 돌아볼 때, 여러 통찰의 계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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