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칠이를 아시나요?
강원도 평창 어느 산골에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과 작은 암캉아지 한 마리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오랜 지병에 중병이 겹쳐 시내 병원에서 입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물론 간병은 할머니 몫이었다. 그래서 작은 강아지는 집에 혼자 있게 되었고 그 와중에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예쁜 새끼를 두 마리나 혼자 낳고 길렀다. 얼마 후 아무런 가능성이 없이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집으로 돌아오신 할아버지께 찾아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과 기도를 드렸는데, 내게 강아지 한 마리를 가져가 기르라고 선물로 주셨다. 그날이 올 4월 7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강아지 이름을 ‘사칠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그 후로도 할아버지는 얼마를 더 사셨고 그 기간에 사칠이도 성당 개로 자리잡아갔다. 강아지였던 관계로 성호경이나 기도문은 못 외웠지만 사람들처럼 성당 안에서 소란스럽거나 미사시간에 전화 받거나 하는 경거망동한 짓은 하지 않았다. 성당 문이 열려 있어도 절대로 함부로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맨발에 슬리퍼나 민소매로는 성당 현관 가까이조차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필요할 때 가끔 해주던 목줄도 믿고 24시간 풀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녀석이 어디론가 없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할아버지도 하느님께로 떠나가셨다.
이곳에 온 이후 이미 개들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었던지라 이 녀석도 제 갈길 갔나보다 하고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성당을 나서는데 웬 발바리 강아지 한 놈이 배가 땅에 붙다시피 기어오더니 내 수단자락에 몸을 부비는 것이다. 내가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다. “사칠아, 너 사칠이 맞니? 내가 네 이름을 불렀더니 네가 비로소 네가 되었구나.” 그렇게 그 녀석은 자기가 틀림없는 진짜 사칠이가 맞다고 온몸으로 말을 했다. 그 녀석도 나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처녀가 집나갈 때는 다 이유가 있다?’ 그랬다. 집나간 녀석의 진가는 얼마지 않아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사칠이는 집을 나갔다 돌아오면서 혼자서 그냥 오지 않았다. 처음엔 두 마리, 다음 날이 되면 세 마리 또 다음 날에는 네 마리로 늘어나더니 최종적으로 일곱 마리의 수놈들을 달고서 돌아온 것이다. 장인 어르신한테 사위될 놈들을 줄줄이 달고서 나타난 것이다. 절대 난감한 상황으로 그날부터 나는 그 녀석들의 목숨 건 유희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볼 수밖에 없었던 하찮은 개들의 사랑은 이랬다.
사랑에는 덩치도 몸무게도 인물도 다 필요 없었다. 하루라도 먼저 나타남 놈이 고참이다. 그 다음 문제는 인내력 싸움이다. 아무리 먼저 왔다해도 자기 볼일 때문에, 자기 즐거움이나 본능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그 녀석이 다시 제일로 꼴찌가 된다.
첫째가 꼴찌 된다? 진짜네. 그러니 아무도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온 순서대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그들은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낮과 밤을 함께 보냈다. 사칠이가 움직이면 모두가 따라 움직인다. 그 모습을 두고서 사람들이 ‘조폭 마누라’와 그 일당들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시골 동네 수캐 일곱 마리에게는 사칠이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러니 누가 먹을 것을 주어도 쉽게 못 먹는다. 먹느라고 눈 돌리고 나면 서열이 바뀌니까?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니 사칠이 이외의 모든 수놈들이 말라가기 시작하였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어도 소용이 없다.
까칠해진 녀석들의 몰골들을 보면서 요즘 몇 주일 연속으로 듣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 말씀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리고 목숨 걸지 않고 대충 어영부영 하는 척만 했던 지난 삶들이 떠오른다. 무엇에든 목숨을 걸고 산 사람의 입은 태산처럼 무겁다. 목숨 걸고 하고나면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신앙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신앙생활이 세속 삶의 연장선에서 대충 얼렁뚱땅인 사람은 늘 말이 많고, 그 많은 말로써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분열을 가져온다. 그렇게 목숨 걸지 않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할 사실이 있다. 개들도 목숨 걸고 사랑할 때는 절대 안 짖는다는 사실.
한여름 복날이 지나니 시골 동네 초저녁 개 짖는 소리도 뜸하구나. 우리의 복날은 언제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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