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실현’에 몸바친 민중의 대변자
농민 노동자가 겪는 억압 부당함 고발
교회 가르침 토대 위에 불의에 대항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대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부하라!”
1980년 3월 24일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병원에 있는 천주의 섭리 소성당에서 거행된 미사를 거행하던 오스카 로메로(Romero, Oscar Arnulfo, 1917~1980) 대주교는 “폭력이 숨쉬기처럼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1979년 5월 13일 미사 강론 중)의 불의에 대항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 대가는 잔인했다. 강론을 마치고 미사를 마저 거행하던 대주교에게 4명의 무장 괴한으로부터 총격이 가해졌다. 이미 예견되던 일이었다. 수시로 그를 향해 협박과 위협을 가하던 불의의 세력들에게 로메로 대주교는 말했다.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는 엘살바도르 민중 안에서 부활할 것이다. 한 주교는 죽지만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세상 복음화에 앞장 서
불의한 사회 구조에 대항해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의 가르침을 국가와 사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이들의 대변자로 살다가 희생된 로메로 대주교. 그에게 참된 복음의 선포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모든 면에서 나라 전체를 복음화’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복음화란 현세적 측면과 초월적 측면,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전례적 측면과 교육적 측면 등 모든 면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교회의 전체적인 삶을 통해서 표현돼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선포,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기쁜 소식을 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 자체를 기쁜 현실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예언자적인 고발, 악을 거부하고 악을 공공연하게 탄핵하고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을 강력하게 요구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고,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명령을 내리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 것을 요구했다. '하느느님의 이름으로’ 불의를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현실 참여적 삶으로 전향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 산 미구엘의 치우다드 바리오스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유아 세례를 받고 1930년 글라라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소신학교에 입학, 1937년에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산 살바도르의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1942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사제로 서품된 뒤 귀국해서는 산 미구엘 교구의 교구장 비서로 임명돼 이후 23년 동안 교구 신문의 편집장, 주교좌 성당의 주임 신부, 소신학교 교장 등의 소임을 받아 활동했다.
1967년에 주교로 서품돼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총장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중앙 아메리카 주교회의 사무국의 상임이사로 선출, 1970년에는 산 살바도르의 보좌주교가 됐고, 1974년에는 산티아고 데 마리아 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됐다.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당초 그의 성향은 결코 진보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았다. 그는 보수적이었으며 이른바 현실 참여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977년 2월 22일 산 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삶의 커다란 전기를 맞는다. 산 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착좌하던 바로 그해 엘살바도르는 정치적 억압, 특히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극에 달해 있었고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교구장으로 착좌한지 불과 20여일이 되던 3월 12일, 예수회 소속의 신부 한 명과 농민 2명이 피살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이른바 ‘회개’ 혹은 ‘전향’의 계기를 맞게 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이러한 전향이라는 말에 대해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공의회 문헌과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문헌, 그리고 메델린 선언(1968), 푸에블라 선언(1979), 바오로 6세 교황의 사도적 권고인 ‘현대의 복음선교’ 등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부당한 것으로 지적하기 시작했고, 사회적 폭력이 증가하자 주일 미사 때마다 그 주에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자연스럽게 권력과 무력을 지닌 이들로부터 격렬한 반감을 불러왔고 결국은 그를 살해하고야 말았다.
그의 복음적이고 사목적인 활동은 공의회 정신과 각종 사회 문헌들, 그리고 특별히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현실을 복음적 가르침과 실천으로 해석한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구원을 추구함에 있어 우리는 현세적 임무를 성덕 및 성화에서 분리시키는 이원론을 피해야 한다”는 메델린 문헌의 지적에 주목하고 “죽음 저편뿐만 아니라 여기 땅위에서도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교회”를 그는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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