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사 안에서 예수님의 삶 죽음 상기
‘역동적인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초대
3. 예루살렘에서의 논쟁 (마르 11, 27~12, 44)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활동지역이었던 갈릴래아에서 적수들과 논쟁을 벌였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2, 1~3, 6)
이제 공생활 후기에 속하는 예루살렘에서의 초기 활동 안에서도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과 벌이는 논쟁과 대담 다섯 가지와 한 가지 비유가 전해진다. (11, 27~12, 37)
예수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시작으로(11, 27~33)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12, 1~12) 주민세에 대한 대담(12, 13~17) 부활에 대한 논쟁(12, 18~27) 첫째 가는 계명에 대한 대담(12, 28~34) 다윗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12, 35~37)이 나오고, 이어서 율사들을 조심하라는 충고(12, 38~40)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12, 41~44)과 관련된 말씀이 전해진다.
예수님의 권한 논쟁 (11, 27~33)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시비를 걸어온다. 이들은 앞으로 예수님을 처형하는데 앞장 설 최고의회 의원들로 예루살렘 성전 신심을 대표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성전의 제사들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신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였으며, 누가 그 권한을 주었느냐고 따져 묻는다.(28절)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에 대한 전권(全權)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묻는다.(29~30절) 예수님의 활동은 세례자 요한의 대중적인 참회운동과 노선이 같은 것으로, 방법면에 차이는 있었지만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죄의 회개와 믿음을 촉구함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에 대비하도록 한 것이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성전 중심의 종교 생활이 아니라 역동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였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그들이 빠진 모순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대답을 회피할 수밖에 없다.(31~33a절) 그들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 (12, 1~12)
수석사제와 율법학자와 원로들에 대한 비판의 말씀이 이번에는 비유 말씀으로 소개되어,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마음이 완고한 백성에게는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이사 6, 9~10; 마르 4, 11~12; 8, 18)
포도원 소작인들의 이야기는 엄밀히 비유라기보다 우화라고 할 수 있겠는데, 비유 양식이 한 가지 뜻을 전하기 위해 일상적인 소재로 자연스럽게 꾸며지는 이야기인데 비해, 우화는 여러 가지 뜻을 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꾸며져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어색하다.
어떤 포도밭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세를 놓고 멀리 떠났는데, 포도 철이 되어 도조를 받으려고 여러 차례 종을 보낸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거나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주고 죽이기까지 한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상속자인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게 되는데 사악한 소작인들이 아들마저 죽이고 말았으니 그 주인이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라는 이야기다.(12, 1~9)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사 안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상기하게 된다. 하느님(=포도밭 주인)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예언자들(=종들)을 보냈으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악한 소작인들)이 이들을 함부로 대하여 고통을 당하거나 숨지게 하였고, 마침내 예수님(=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으나 그마저 죽게 하였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심판하시고, 하느님 백성(=포도밭)을 교회(=다른 사람들)에 맡기시겠다는 말이다.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 이야기에 첨가된 성서 인용구(시편 118, 22~23)도 같은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집 짓는 이들(=이스라엘 백성과 그 지도자들)이 내버린 돌(=십자가의 예수님)처럼 버림 받고 죽게 되겠지만, 하느님의 구원 섭리로 모퉁이(=새로운 구원공동체)의 머릿돌(=부활하신 그리스도)이 되셔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비유의 말씀들이 자기들을 향한 단죄의 말씀임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지만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그대로 두고 떠나간다.(12절)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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